산작은 가변폭으로 설계했다. 고정폭으로 수정하려면 획이나 동세의 흐름을 포기하고 아무래도 글자틀에 맞게 넓히고 균등하게 재배열하는 과정을 거쳐야 하는데, 이를 바로 시도하기엔 부담스러웠다. 산작을 수정하고 있던 당시에도 디자이너들 입장에선 고정폭 글꼴로 본문을 조판하는 것이 익숙하고 편안할 것으로 예상은 했다. 그래서 시험삼아 산작을 고정폭으로 몇 글자 만들기 시작했다. 균형은 산작에 기반하지만, 가로로 조판하기에 좀 더 적합하게 수정했다. ‘를’과 같은 세로모임꼴 글자는 보를 좁히고, 글자높이는 일정하게 압축했다. ‘김’과 같은 가로모임꼴 글자는 고정폭 너비에 맞춰서 글자너비를 확장했다. 부리, 인상을 좀 더 날렵하게 변경하면서 획 설계도 3-10유닛 가늘게 바꿨다. 가능하면 24년에는 출시하려고 한다.
11172.kr은 2022년부터 운영하기 시작했다. 세부적인 기능 구현은 옥이랑 디자이너의 도움을 받았다. 내가 만든 글꼴을 판매하려고 만들기 시작했지만, 주변의 글꼴 디자이너들도 함께 판매할 수 있도록 자리를 만들었다. 가급적 품이 들지 않도록 시스템을 구축했고, 문의를 할 만한 부분도 미리 정리했다. 유지비용을 최대한 줄였기 때문에 입점 수수료도 10%로 책정했다. 이 정도가 적정한 기준이라고 본다. 이번 여름에는 글자디자인에 관심 있는 분들을 위해서 글립스 사용법과 레터링 관련 모임도 진행해 볼까 한다. 언젠가는 한 벌의 글꼴을 완성해 오길 기대하면서. 쉽지 않은 환경이지만 한글 글꼴 유통이 건강하고 활발하게 이루어지길 희망한다.
어도비 일러스트레이터의 모퉁이 위젯은 업데이트된 이후 도형을 작도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는 기능 중 하나다. 손쉽고 빠르게 모서리를 굴리거나 둥글게 만들 수 있어서 다양하게 활용된다. 최근에는 이 모서리에서 기계적인, 천편일률적인 곡률이 싫을 때가 있어서 살짝 변형한 곡선을 사용하곤 한다. 모서리 하나하나씩 수정하는 순간 작업시간은 당연히 몇 시간이 늘어난다. 툴이 발달해도 여전히 개인의 기호와 취향을 반영할 곳을 찾기 마련이다.
산작을 제작하면서, ‘ㅜ’와 ‘ㅇ’이 만날 때나 ‘ㅎ’의 경우 상투는 없애거나 정리하지 않고 서로 일정하게 겹치는 정도로 처리했다. 낱글자에 따라 있는 경우도 있고, 없는 경우도 있다. 낱자가 결합하는 한글의 특성상 “겹침“이라는 단어는 꽤 오랫동안 머릿속에 머물러있던 개념이기도 하다. 상투는 ‘ㅇ’의 조임을 강조하는 역할을 하기도하고, 속공간과 낱자 면적을 조율하는 장치로도 기능한다. 상투 없이 밋밋한 ‘ㅇ’을 가진 글자 균형을 조율하다 보면 결국 어느 지점에서 속공간이 눈에 걸리는 곳들이 생겨나곤 한다.
무엇인가 매끈하게 다듬는 것이 디자이너의 본능이라 그런 것일까?, 디지털 환경에서 복사, 붙여넣기가 손쉬워서 그런 것일까? 혹은 둘 다인지 모르겠지만 한글의 이런 '턱'들은 너무 고민 없이 밀려버리거나 조합별로 통일되어 버리곤 했다.
숙련된 글자 디자이너들은 대부분 선 다루는 게 굉장히 익숙해서 조형만 봐도 어떻게 점을 구성했는지 역산이 가능할 텐데, 최근 몇 년간 수업을 진행하는 학생들을 대상으로 테스트를 해보곤 했다.
선으로 이루어진 글자를 A4용지에 출력해서 앵커포인트와 핸들포인트를 필기구로 표시하도록 했다. 벡터그래픽의 기반이 되는 베지에 곡선을 잘 체화하고 있는지 테스트해본 것인데, 의외로 꽤 많은 학생들이 핸들포인트를 반대로(...) 구사하는 경우가 있어서 꽤 놀랐다. 생각해보면 펜 툴을 다룰 일은 점점 줄어들고 있고, 누군가 만든 소스를 활용하고 배열하는 것만으로 결과물을 만드는 일이 많아졌다. 도구와 AI가 발전할수록 이런 일이 많아질 텐데, 기본기를 어떻게 다듬을지 고민이 드는 지점이기도 하다.
스스로 표시한 후에는 고정점과 조절점이 표시된 종이를 받아 자신이 작성한 종이를 비춰볼 수 있도록 했다. 조절점의 강약이 틀린 건 괜찮지만, 방향이 틀린 것은 베지에 곡선이 구현되는 원리에 대해서 다시 한번 되돌아보면 좋다.
고정점만 표시한 이미지
고정점과 조절점을 함께 표시한 이미지. 펜 툴을 다루는 것에 익숙한 디자이너라면 조절점의 위치에 따라 곡선이 어떻게 변화하는지 예측할 수 있을 것이다.
붓글씨를 시작하면서 처음 배우는 원칙 중 하나가 한 획에 한 번 이상 손대지 말라는 것이다. 나이가 어린 학생들은 종종 멋진 글씨를 쓰고 싶은 마음에 획을 몇 번씩 덧칠하기도 한다. 그러나 한 획을 두 번 긋는 순간 좌우에 미묘한 어긋남이 생기고 만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디지털로 글자를 설계할 때도 대부분 한 획은 한 번에 그인 것처럼 솜씨 좋게 선을 다듬을 필요가 강제된다. 특히 ㅊ의 삐침을 이루는 왼쪽과 오른쪽 각각의 곡선과 같은 지점에서 그러한 특징이 잘 드러난다.
그런데, 한글 글꼴이 어려운 것은 세부적으로 파고들수록 이러한 원칙들이 상충하는 지점이 나타난다. 획의 일관성도 중요하지만, 속공간의 관점에서 낱글자를 바라보면 또 다른 지점이 있다. 산작을 설계하면서 속공간을 이루는 내곽의 선은 직선으로 설계했지만, ㄹ의 바깥선은 곡선으로 설계했다. 시선이 들어오는 외곽의 선은 곡선이 더 적합하다고 판단했고, 속공간을 이루는 내곽의 선은 직선을 적용하는 것이 적합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는 곡선에 비해 직선으로 속공간을 설계했을 때 글자가 더 시원하고 깔끔하게 보이는 효과를 노린 것이기도 하다.
또, 속공간은 글자를 세우는 골격 역할을 병행하므로 글자가 좀 더 단단하게 보이길 바란 것이기도 하다.
개인적으로 글꼴을 볼 때 4가지 기준을 가지고 따져본다. 1. 모작: 충분히 잘 베꼈는가? 2. 열화: 충분히 잘 못 베꼈는가? 3. 역설계: 사람이 편안하게 느끼는 요소들을 잘 이해하고 있는가? 4: 재조합: 읽어낸 요소들을 유기적인 맥락으로 잘 연결했는가?
새롭다는 것은, 기존에 없던 것을 발견하거나, 기존에 존재하는 것을 새롭게 조합하는 것이다. 글꼴 설계에서 새로운 것을 발견하는 것은 어렵다. 이미 수백, 수천 년간 사람들이 쌓아둔 데이터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기존에 존재하는 것들을 잘 분석하고, 이해하고, 새롭게 조합하는 것이 글꼴 디자이너가 창의성을 발휘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타이포그래피를 다루는 사람들 중에는 때때로 서예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경우가 있다. 기본적으로는 동의하지만, 목적과 수단을 혼동할 필요는 없다. 중요한 것은 서예 그 자체가 아니라 붓이 움직이는 원리, 사람의 몸이 움직이는 동선을 이해하고 다룰 수 있는 것이다. 서예가와 글꼴 디자이너 서로 이해하고 활용하는 영역이 다르다.
글꼴은 어떤 시각에서는, 글씨의 모조품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기술과 인식의 확장에 따라 가짜로 여겨지던 것이 원본을 대체하는 현상은 언제나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현재의 글꼴 디자인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을 글씨의 역설계 과정이라고 본다. 글꼴은 이미 오래전에 글씨의 영역을 일정 부분 대체할 만큼 편리했지만, 아직 글씨의 깊고 세밀한 부분들을 충분히 이해하고 분석한 상황은 아니라고 보기 때문이다.
글자체의 개성과 특징은 부리에 잘 드러난다. 그러나 글자체의 품질에 대한 판단이 필요한 경우, (물론 다양한 기준으로 판단해야겠지만) 우선 꺾임을 어떻게 설계했는지 살펴본다.
꺾임은 한번 뻗은 획의 기세가 정리되는 동시에 다음 지점으로 넘어가기 위한 디딤돌의 역할을 한다. 따라서 획의 길이, 각도에 따라 꺾임의 모양도 달라진다. 기역의 경우를 살펴보면 기운줄기가 45도 각도로 꺾이는 것부터 90도로 꺾이는 것까지 다양하다. 그에 따라 꺾임의 모양도 변화한다. 디자이너가 필기구와 신체의 구조, 움직임을 잘 이해하고 있어야 꺾임을 자연스럽게 설계할 수 있다.
그런데 글꼴 제작에 컴퓨터가 도입되면서 복사/붙여넣기가 쉬워졌다. 물론 압도적으로 장점이 많지만, 서로 달라야 할 낱자가 지나치게 비슷하게 그려지는 경향이 눈에 띈다. 심각하게는 획의 움직임과 관계없이 꺾임이 일괄적으로 똑같이 생긴 경우도 발견된다. 아무리 통일성이 강조되더라도 기역은 기역처럼 생겨야 하고, 니은은 니은처럼, 미음은 미음처럼 보여야 한다.
붓은 부드러운 털을 먹에 적셔서 쓴다. 그래서 만년필이나 연필, 볼펜 등 끝이 단단한 필기구에 비해 자유분방하고 강약조절에 장점이 있다. 물론 사용이 어렵고 오래 걸린다는 단점도 있다.
붓이 종이에 처음 닿는 부분을 기필, 혹은 입필이라고 한다. 부리를 말하는 것인데, 붓이라는 도구의 특징이 확고하게 드러나는 부분인 동시에 다양한 가능성이 정리되고, 앞으로 뻗어갈 획에 대한 준비를 마치는 곳이다. 종이에 붓을 대는 순간, 붓끝의 무수한 모와 먹을 가다듬는 것이다. 부리는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도구의 특징과 가능성이 단적으로 드러나는 부분으로, 작은 부분이지만 힘의 흐름이 다채롭게 녹아있기 때문에 곡선과 표현을 더 예민하게 다듬어야 한다. 특히 ‘빼’나 ‘ㅖ’처럼 부리가 많고 그 각도나 힘이 제각각 달라지는 경우 그 난이도는 수직 상승한다.
고딕의 시각보정은 두께와 길이, 높이를 중심으로 설계된다. 반면, 명조의 시각보정은 부리와 맺음의 크기를 중심으로 설계된다. 명조의 보(ㅡ)를 살펴보자. 보의 부리와 맺음은 왜 유독 크게 설계되어 있을까? 몇 가지 이유를 찾아보자. 첫 번째 설명은 낱글자의 외곽을 튼튼하게 만들기 위함이다. 그러나 이는 첫 닿자(자음글자)의 부리, 맺음과 비교해 크게 설계된 이유가 아니라 부리와 맺음의 역할 그 자체라는 점에서 제대로 된 설명이 아니다. 두 번째. 보(ㅡ)는 낱글자에서 가장 긴 획인 동시에 가장 힘찬 기세를 담은 획이므로 이를 반영한 것이다. 꽤 많은 부분이 설명되긴 하지만, 본질적으로 왜 사람이 글자를 쓸 때 보를 길게 쓰고, 그를 자연스럽게 여기는지 설명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한계를 보인다. 그렇다면 세 번째. 지금까지 찾은 가장 설득력 있는 설명은 이렇다. 조합되는 낱자(ㅌ/ㅡ/ㄷ)의 존재감을 비등하게 유지하기 위한 장치다. 보는 단 하나의 선으로 닿자(ㄱ-ㅎ)과 동등한 수준의 존재감을 가지려고 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하나 더. 홀자'ㅣ'와 'ㅡ'를 비교해보자. 대체로 세로기둥보다는 가로로 쓴 'ㅡ'꼴에서 부리와 맺음이 더 크다.
어도비 일러스트레이터 펜 툴로 작업할 때, 직선 다음에 이어지는 곡선의 핸들을 하나만 쓰는 경우를 꽤 자주 본다. 이렇게 작도하는 경우, 보이지 않는 핸들 포인트는 고정점의 영점에 숨어있다. 펜 툴로 선을 이어 그리면 자연스럽게 그렇게 유도되기 때문에 그런 듯하다. 좀 더 아름답고 균형잡힌 곡선을 구현하고 싶다면 핸들 포인트를 두 개 다 꺼내쓰라고 권유하는 편이다.
디자인이 완성되는 시점은 어디일까? 많은 책 디자이너는 책이 인쇄되어 물성을 획득하는 시점을 책 디자인의 완성으로 여기는 듯하다. 나 역시 종이에 인쇄된 글자를 볼 때, 데이터로만 존재하던 글꼴이 현실에 발을 내딛는 듯한 감정을 종종 느낀다.
그러나 글꼴 디자인은 그 결과물이 데이터인 글꼴(폰트)로 완성되는 일이고, 그렇기 때문에 완성의 시점은 어디인지 고민스럽다. 그런 과정을 몇 년간 거치다 보면 물성에 대한 집착이 어느 순간 데이터의 완결성에 대한 집착으로 바뀐다. 글자를 구성하는 점의 개수. 점의 위치. 곡선에 이르는 요소 하나하나가 논리적이라고 여겨질 때, 더는 설명하기 어려울 만큼 쪼개어놓았을 때, 데이터가 데이터 그 자체로 아름다운 순간에 집착하게 된다.
한편, 많은 툴에서 표준처럼 사용하는 글꼴의 기본 크기인 12포인트는 6분의 1인치, 1파이카를 포인트로 변환한 것이다. 72포인트는 1인치(=6파이카)를 변환한 것이다.
표 문자, 괘선 문자, 혹은 상자 그리기 문자(Box Drawings Characters)는 이름 그대로 상자나 표를 그릴 때 사용하는 문자다. 선이 조각된 글자를 하나씩 꿰맞춰 표를 그릴 수 있고, 대체로 도스(DOS) 운영체제나 초기의 게임 그래픽, 간혹 아스키 아트에서 볼 수 있다.
즉, 요즘처럼 그래픽 툴이나 표 그리기가 쉬운 환경에서는 정상적으로는 사용할 일이 거의 없는 문자고 처음 목적을 잃어버리고 표를 그릴 수 없게 만들어 놓은 글꼴도 있다. 게다가 자간, 행간이 딱 붙게 조절해야 하고 고정폭으로 설정해야 하니 이걸 써서 깔끔한 표 한 장 그리는 건 아주 골치아프다. 이놈을 이제 그만 문자 세트에서 빼야 하나 고민도 해보지만, 대부분의 글꼴 규격에 포함되어 있어서 안 그려 넣기엔 찜찜하다. 막상 그리기는 어렵지 않아서 사실 별 불만 없이 쉬어가는 시간 정도로 생각하며 그려 넣곤 한다. 대체로 표 문자는 선을 여백 없이 끝까지 채워 넣는 것이 일반적이다.
각각의 표 문자를 배열 중인 모습
각각의 표 문자를 조합하면 여러가지 표를 그릴 수 있다. 물론 현 시점에서는 더 편리한 방법이 많다. 엑셀이나 표 그리기에 특화된 프로그램이 아니더라도 대부분의 편집 프로그램에서 표 그리기 기능을 제공하고 있다.
어도비 일러스트레이터 툴은 대부분의 학교에서 기본적으로 제공하는 편이다. 그래서 학생들과 레터링을 작업할 때, 가르칠 때 사용하는 빈도가 점차 늘고 있다. 그런데 학생들에게 설명하려고 보니 앵커(anchor), 핸들(handle) 등 용어에서부터 소통이 막히는 일도 빈번하다. 어떤 경우는 외래어를 쓰고, 어떤 경우는 한글로 쓰는 부분도 조금 아쉬운 부분이지만 근본적으로는 세부적인 명칭까지 외우면서 작업하는 사례 자체가 드물기도 하다.
어쨌든, 용어는 조금씩 수정해나갔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는데 개인적으로는 일러스트레이터에 이미 적용되어있는 「고정점」은 아주 익숙하게 쓰고 있고, 「핸들」은 「조절점」 정도로 수정하면 좋겠다. 「패스」는 「선이나 곡선」 혹은 「경로」 정도로 바꾸면 괜찮을 것 같다. 대체로 학생들에게 “패스를 좀 더 만져주세요, 곡선을 예쁘게 다듬어주세요” 정도로 적당히 뭉뚱그려서 말하곤 하지만, 때때로 좀 더 세밀하게 말해야 하는 상황은 있기 마련이고, 그럴 때는 핸들(조절점)의 비율을 맞춰달라거나, 특정 비율로 수정해보도록 권유한다.
한글 부리 글자의 획 모양을 살펴보면 대체로 획의 외곽에 해당하는 부분은 부리나 맺음, 꺾임 등 ‘무게추’ 역할을 할 만한 장치를 달아 시선이 쉽게 들거나 빠지는 것을 막는다. 이를 8가지 방향으로 나누어 보면, 이 중 시선이 드나들도록 설계된 곳은 2번, 4번, 5번이다. 이곳에는 무게추의 역할을 수행하는 장치가 없다. 물론 세로쓰기의 영향을 고려하면 아래로 시선이 흐르는 것은 자연스럽다고 볼 수도 있으나, 같은 세로쓰기 문자인 한자를 살펴보면 대체로 5번 방향에 무게추를 놓아 시선을 막는 경향을 보인다.
왜 이런 차이가 나타나는가? 여러 요인이 작용하겠지만, 그중 한 가지 가설은 한 글자로서 의미가 완결되는 한자(표의문자)는 그 끝을 맺어주고, 낱글자 하나로 의미가 완성되지 않는 한글(표음문자)은 연결성을 중시한 것이 아닌가 추측한다.
타이포그래피는 그 용어에서부터 알 수 있듯이 이론의 많은 부분이 외국에서 비롯되었다. 그래서 이론이 라틴 알파벳을 기준으로 작성된 경우가 많고, 한글에 적용하려면 다소 초점을 잡아주어야 할 경우가 생긴다.
대부분의 경우, 시각 보정은 한글이 합자라는 사실을 고려해서 설명하고 있지 않다. '를'을 예시로 들어보자. 첫 닿자 'ㄹ'의 맺음을 키울 것인가 줄일 것인가? 이 경우 두 가지 선택지가 발생한다.
첫 번째, 낱자(ㄹ)의 관점을 좀 더 반영해서 작업한다면 맺음이 커져야 한다. 하나의 조형에서 외곽, 마무리에 해당하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이 감각은 글을 다 쓴 뒤 마침표를 찍는 감각에 가깝다.
두 번째, 낱글자(를)의 관점에서 시각 보정을 수행한다면 맺음은 작아져야 한다. 이는 하나의 조형(를)의 중심부에 위치하기 때문이다. 맺음을 키우던, 줄이던 둘 다 나름대로 이유가 있는 결정이고, 어떤 결정이 단순하게 나쁘다고 말할 수 없으나, 하나의 글자가족 안에서 이 관점이 이유없이 흔들린다면 좋은 글꼴이라 말하기는 어렵다.
산작은 가변폭으로 설계했다. 고정폭으로 수정하려면 획이나 동세의 흐름을 포기하고 아무래도 글자틀에 맞게 넓히고 균등하게 재배열하는 과정을 거쳐야 하는데, 이를 바로 시도하기엔 부담스러웠다. 산작을 수정하고 있던 당시에도 디자이너들 입장에선 고정폭 글꼴로 본문을 조판하는 것이 익숙하고 편안할 것으로 예상은 했다. 그래서 시험삼아 산작을 고정폭으로 몇 글자 만들기 시작했다. 균형은 산작에 기반하지만, 가로로 조판하기에 좀 더 적합하게 수정했다. ‘를’과 같은 세로모임꼴 글자는 보를 좁히고, 글자높이는 일정하게 압축했다. ‘김’과 같은 가로모임꼴 글자는 고정폭 너비에 맞춰서 글자너비를 확장했다. 부리, 인상을 좀 더 날렵하게 변경하면서 획 설계도 3-10유닛 가늘게 바꿨다. 가능하면 24년에는 출시하려고 한다.
11172.kr은 2022년부터 운영하기 시작했다. 세부적인 기능 구현은 옥이랑 디자이너의 도움을 받았다. 내가 만든 글꼴을 판매하려고 만들기 시작했지만, 주변의 글꼴 디자이너들도 함께 판매할 수 있도록 자리를 만들었다. 가급적 품이 들지 않도록 시스템을 구축했고, 문의를 할 만한 부분도 미리 정리했다. 유지비용을 최대한 줄였기 때문에 입점 수수료도 10%로 책정했다. 이 정도가 적정한 기준이라고 본다. 이번 여름에는 글자디자인에 관심 있는 분들을 위해서 글립스 사용법과 레터링 관련 모임도 진행해 볼까 한다. 언젠가는 한 벌의 글꼴을 완성해 오길 기대하면서. 쉽지 않은 환경이지만 한글 글꼴 유통이 건강하고 활발하게 이루어지길 희망한다.
어도비 일러스트레이터의 모퉁이 위젯. 손쉽게 모서리를 곡선으로 만들 수 있다.
어도비 일러스트레이터의 모퉁이 위젯은 업데이트된 이후 도형을 작도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는 기능 중 하나다. 손쉽고 빠르게 모서리를 굴리거나 둥글게 만들 수 있어서 다양하게 활용된다. 최근에는 이 모서리에서 기계적인, 천편일률적인 곡률이 싫을 때가 있어서 살짝 변형한 곡선을 사용하곤 한다. 모서리 하나하나씩 수정하는 순간 작업시간은 당연히 몇 시간이 늘어난다. 툴이 발달해도 여전히 개인의 기호와 취향을 반영할 곳을 찾기 마련이다.
브러쉬 도구로 간단하게 스케치
펜 (P) 도구를 활용해서 선으로 작도
작도한 선을 시각보정으로 조금 더 다듬기
면으로 변환 후 맺음과 두께 보정. 니은(ㄴ)을 미세하게 두껍게 보강했다. 고정점 도구(Shift + C), 고정점 추가 도구(+) 등을 잘 활용하면 원하는 선을 자유자재로 만들 수 있다.
산작을 제작하면서, ‘ㅜ’와 ‘ㅇ’이 만날 때나 ‘ㅎ’의 경우 상투는 없애거나 정리하지 않고 서로 일정하게 겹치는 정도로 처리했다. 낱글자에 따라 있는 경우도 있고, 없는 경우도 있다. 낱자가 결합하는 한글의 특성상 “겹침“이라는 단어는 꽤 오랫동안 머릿속에 머물러있던 개념이기도 하다. 상투는 ‘ㅇ’의 조임을 강조하는 역할을 하기도하고, 속공간과 낱자 면적을 조율하는 장치로도 기능한다. 상투 없이 밋밋한 ‘ㅇ’을 가진 글자 균형을 조율하다 보면 결국 어느 지점에서 속공간이 눈에 걸리는 곳들이 생겨나곤 한다.
무엇인가 매끈하게 다듬는 것이 디자이너의 본능이라 그런 것일까?, 디지털 환경에서 복사, 붙여넣기가 손쉬워서 그런 것일까? 혹은 둘 다인지 모르겠지만 한글의 이런 '턱'들은 너무 고민 없이 밀려버리거나 조합별로 통일되어 버리곤 했다.
그나저나, 산작은 너무 턱이 많나?😎
숙련된 글자 디자이너들은 대부분 선 다루는 게 굉장히 익숙해서 조형만 봐도 어떻게 점을 구성했는지 역산이 가능할 텐데, 최근 몇 년간 수업을 진행하는 학생들을 대상으로 테스트를 해보곤 했다.
선으로 이루어진 글자를 A4용지에 출력해서 앵커포인트와 핸들포인트를 필기구로 표시하도록 했다. 벡터그래픽의 기반이 되는 베지에 곡선을 잘 체화하고 있는지 테스트해본 것인데, 의외로 꽤 많은 학생들이 핸들포인트를 반대로(...) 구사하는 경우가 있어서 꽤 놀랐다. 생각해보면 펜 툴을 다룰 일은 점점 줄어들고 있고, 누군가 만든 소스를 활용하고 배열하는 것만으로 결과물을 만드는 일이 많아졌다. 도구와 AI가 발전할수록 이런 일이 많아질 텐데, 기본기를 어떻게 다듬을지 고민이 드는 지점이기도 하다.
스스로 표시한 후에는 고정점과 조절점이 표시된 종이를 받아 자신이 작성한 종이를 비춰볼 수 있도록 했다. 조절점의 강약이 틀린 건 괜찮지만, 방향이 틀린 것은 베지에 곡선이 구현되는 원리에 대해서 다시 한번 되돌아보면 좋다.
고정점만 표시한 이미지
고정점과 조절점을 함께 표시한 이미지. 펜 툴을 다루는 것에 익숙한 디자이너라면 조절점의 위치에 따라 곡선이 어떻게 변화하는지 예측할 수 있을 것이다.
붓글씨를 시작하면서 처음 배우는 원칙 중 하나가 한 획에 한 번 이상 손대지 말라는 것이다. 나이가 어린 학생들은 종종 멋진 글씨를 쓰고 싶은 마음에 획을 몇 번씩 덧칠하기도 한다. 그러나 한 획을 두 번 긋는 순간 좌우에 미묘한 어긋남이 생기고 만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디지털로 글자를 설계할 때도 대부분 한 획은 한 번에 그인 것처럼 솜씨 좋게 선을 다듬을 필요가 강제된다. 특히 ㅊ의 삐침을 이루는 왼쪽과 오른쪽 각각의 곡선과 같은 지점에서 그러한 특징이 잘 드러난다.
그런데, 한글 글꼴이 어려운 것은 세부적으로 파고들수록 이러한 원칙들이 상충하는 지점이 나타난다. 획의 일관성도 중요하지만, 속공간의 관점에서 낱글자를 바라보면 또 다른 지점이 있다. 산작을 설계하면서 속공간을 이루는 내곽의 선은 직선으로 설계했지만, ㄹ의 바깥선은 곡선으로 설계했다. 시선이 들어오는 외곽의 선은 곡선이 더 적합하다고 판단했고, 속공간을 이루는 내곽의 선은 직선을 적용하는 것이 적합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는 곡선에 비해 직선으로 속공간을 설계했을 때 글자가 더 시원하고 깔끔하게 보이는 효과를 노린 것이기도 하다.
또, 속공간은 글자를 세우는 골격 역할을 병행하므로 글자가 좀 더 단단하게 보이길 바란 것이기도 하다.
개인적으로 글꼴을 볼 때 4가지 기준을 가지고 따져본다.
1. 모작: 충분히 잘 베꼈는가?
2. 열화: 충분히 잘 못 베꼈는가?
3. 역설계: 사람이 편안하게 느끼는 요소들을 잘 이해하고 있는가?
4: 재조합: 읽어낸 요소들을 유기적인 맥락으로 잘 연결했는가?
새롭다는 것은, 기존에 없던 것을 발견하거나, 기존에 존재하는 것을 새롭게 조합하는 것이다. 글꼴 설계에서 새로운 것을 발견하는 것은 어렵다. 이미 수백, 수천 년간 사람들이 쌓아둔 데이터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기존에 존재하는 것들을 잘 분석하고, 이해하고, 새롭게 조합하는 것이 글꼴 디자이너가 창의성을 발휘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타이포그래피를 다루는 사람들 중에는 때때로 서예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경우가 있다. 기본적으로는 동의하지만, 목적과 수단을 혼동할 필요는 없다. 중요한 것은 서예 그 자체가 아니라 붓이 움직이는 원리, 사람의 몸이 움직이는 동선을 이해하고 다룰 수 있는 것이다. 서예가와 글꼴 디자이너 서로 이해하고 활용하는 영역이 다르다.
글꼴은 어떤 시각에서는, 글씨의 모조품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기술과 인식의 확장에 따라 가짜로 여겨지던 것이 원본을 대체하는 현상은 언제나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현재의 글꼴 디자인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을 글씨의 역설계 과정이라고 본다. 글꼴은 이미 오래전에 글씨의 영역을 일정 부분 대체할 만큼 편리했지만, 아직 글씨의 깊고 세밀한 부분들을 충분히 이해하고 분석한 상황은 아니라고 보기 때문이다.
글자체의 개성과 특징은 부리에 잘 드러난다. 그러나 글자체의 품질에 대한 판단이 필요한 경우, (물론 다양한 기준으로 판단해야겠지만) 우선 꺾임을 어떻게 설계했는지 살펴본다.
꺾임은 한번 뻗은 획의 기세가 정리되는 동시에 다음 지점으로 넘어가기 위한 디딤돌의 역할을 한다. 따라서 획의 길이, 각도에 따라 꺾임의 모양도 달라진다. 기역의 경우를 살펴보면 기운줄기가 45도 각도로 꺾이는 것부터 90도로 꺾이는 것까지 다양하다. 그에 따라 꺾임의 모양도 변화한다. 디자이너가 필기구와 신체의 구조, 움직임을 잘 이해하고 있어야 꺾임을 자연스럽게 설계할 수 있다.
그런데 글꼴 제작에 컴퓨터가 도입되면서 복사/붙여넣기가 쉬워졌다. 물론 압도적으로 장점이 많지만, 서로 달라야 할 낱자가 지나치게 비슷하게 그려지는 경향이 눈에 띈다. 심각하게는 획의 움직임과 관계없이 꺾임이 일괄적으로 똑같이 생긴 경우도 발견된다. 아무리 통일성이 강조되더라도 기역은 기역처럼 생겨야 하고, 니은은 니은처럼, 미음은 미음처럼 보여야 한다.
붓은 부드러운 털을 먹에 적셔서 쓴다. 그래서 만년필이나 연필, 볼펜 등 끝이 단단한 필기구에 비해 자유분방하고 강약조절에 장점이 있다. 물론 사용이 어렵고 오래 걸린다는 단점도 있다.
붓이 종이에 처음 닿는 부분을 기필, 혹은 입필이라고 한다. 부리를 말하는 것인데, 붓이라는 도구의 특징이 확고하게 드러나는 부분인 동시에 다양한 가능성이 정리되고, 앞으로 뻗어갈 획에 대한 준비를 마치는 곳이다. 종이에 붓을 대는 순간, 붓끝의 무수한 모와 먹을 가다듬는 것이다. 부리는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도구의 특징과 가능성이 단적으로 드러나는 부분으로, 작은 부분이지만 힘의 흐름이 다채롭게 녹아있기 때문에 곡선과 표현을 더 예민하게 다듬어야 한다. 특히 ‘빼’나 ‘ㅖ’처럼 부리가 많고 그 각도나 힘이 제각각 달라지는 경우 그 난이도는 수직 상승한다.
고딕의 시각보정은 두께와 길이, 높이를 중심으로 설계된다. 반면, 명조의 시각보정은 부리와 맺음의 크기를 중심으로 설계된다.
명조의 보(ㅡ)를 살펴보자. 보의 부리와 맺음은 왜 유독 크게 설계되어 있을까? 몇 가지 이유를 찾아보자. 첫 번째 설명은 낱글자의 외곽을 튼튼하게 만들기 위함이다. 그러나 이는 첫 닿자(자음글자)의 부리, 맺음과 비교해 크게 설계된 이유가 아니라 부리와 맺음의 역할 그 자체라는 점에서 제대로 된 설명이 아니다. 두 번째. 보(ㅡ)는 낱글자에서 가장 긴 획인 동시에 가장 힘찬 기세를 담은 획이므로 이를 반영한 것이다. 꽤 많은 부분이 설명되긴 하지만, 본질적으로 왜 사람이 글자를 쓸 때 보를 길게 쓰고, 그를 자연스럽게 여기는지 설명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한계를 보인다. 그렇다면 세 번째. 지금까지 찾은 가장 설득력 있는 설명은 이렇다. 조합되는 낱자(ㅌ/ㅡ/ㄷ)의 존재감을 비등하게 유지하기 위한 장치다. 보는 단 하나의 선으로 닿자(ㄱ-ㅎ)과 동등한 수준의 존재감을 가지려고 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하나 더. 홀자'ㅣ'와 'ㅡ'를 비교해보자. 대체로 세로기둥보다는 가로로 쓴 'ㅡ'꼴에서 부리와 맺음이 더 크다.
어도비 일러스트레이터 펜 툴로 작업할 때, 직선 다음에 이어지는 곡선의 핸들을 하나만 쓰는 경우를 꽤 자주 본다. 이렇게 작도하는 경우, 보이지 않는 핸들 포인트는 고정점의 영점에 숨어있다. 펜 툴로 선을 이어 그리면 자연스럽게 그렇게 유도되기 때문에 그런 듯하다. 좀 더 아름답고 균형잡힌 곡선을 구현하고 싶다면 핸들 포인트를 두 개 다 꺼내쓰라고 권유하는 편이다.
디자인이 완성되는 시점은 어디일까? 많은 책 디자이너는 책이 인쇄되어 물성을 획득하는 시점을 책 디자인의 완성으로 여기는 듯하다. 나 역시 종이에 인쇄된 글자를 볼 때, 데이터로만 존재하던 글꼴이 현실에 발을 내딛는 듯한 감정을 종종 느낀다.
그러나 글꼴 디자인은 그 결과물이 데이터인 글꼴(폰트)로 완성되는 일이고, 그렇기 때문에 완성의 시점은 어디인지 고민스럽다. 그런 과정을 몇 년간 거치다 보면 물성에 대한 집착이 어느 순간 데이터의 완결성에 대한 집착으로 바뀐다. 글자를 구성하는 점의 개수. 점의 위치. 곡선에 이르는 요소 하나하나가 논리적이라고 여겨질 때, 더는 설명하기 어려울 만큼 쪼개어놓았을 때, 데이터가 데이터 그 자체로 아름다운 순간에 집착하게 된다.
한편, 많은 툴에서 표준처럼 사용하는 글꼴의 기본 크기인 12포인트는 6분의 1인치, 1파이카를 포인트로 변환한 것이다. 72포인트는 1인치(=6파이카)를 변환한 것이다.
표 문자, 괘선 문자, 혹은 상자 그리기 문자(Box Drawings Characters)는 이름 그대로 상자나 표를 그릴 때 사용하는 문자다. 선이 조각된 글자를 하나씩 꿰맞춰 표를 그릴 수 있고, 대체로 도스(DOS) 운영체제나 초기의 게임 그래픽, 간혹 아스키 아트에서 볼 수 있다.
즉, 요즘처럼 그래픽 툴이나 표 그리기가 쉬운 환경에서는 정상적으로는 사용할 일이 거의 없는 문자고 처음 목적을 잃어버리고 표를 그릴 수 없게 만들어 놓은 글꼴도 있다. 게다가 자간, 행간이 딱 붙게 조절해야 하고 고정폭으로 설정해야 하니 이걸 써서 깔끔한 표 한 장 그리는 건 아주 골치아프다. 이놈을 이제 그만 문자 세트에서 빼야 하나 고민도 해보지만, 대부분의 글꼴 규격에 포함되어 있어서 안 그려 넣기엔 찜찜하다. 막상 그리기는 어렵지 않아서 사실 별 불만 없이 쉬어가는 시간 정도로 생각하며 그려 넣곤 한다. 대체로 표 문자는 선을 여백 없이 끝까지 채워 넣는 것이 일반적이다.
각각의 표 문자를 배열 중인 모습
각각의 표 문자를 조합하면 여러가지 표를 그릴 수 있다. 물론 현 시점에서는 더 편리한 방법이 많다. 엑셀이나 표 그리기에 특화된 프로그램이 아니더라도 대부분의 편집 프로그램에서 표 그리기 기능을 제공하고 있다.
어도비 일러스트레이터 툴은 대부분의 학교에서 기본적으로 제공하는 편이다. 그래서 학생들과 레터링을 작업할 때, 가르칠 때 사용하는 빈도가 점차 늘고 있다. 그런데 학생들에게 설명하려고 보니 앵커(anchor), 핸들(handle) 등 용어에서부터 소통이 막히는 일도 빈번하다. 어떤 경우는 외래어를 쓰고, 어떤 경우는 한글로 쓰는 부분도 조금 아쉬운 부분이지만 근본적으로는 세부적인 명칭까지 외우면서 작업하는 사례 자체가 드물기도 하다.
어쨌든, 용어는 조금씩 수정해나갔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는데 개인적으로는 일러스트레이터에 이미 적용되어있는 「고정점」은 아주 익숙하게 쓰고 있고, 「핸들」은 「조절점」 정도로 수정하면 좋겠다. 「패스」는 「선이나 곡선」 혹은 「경로」 정도로 바꾸면 괜찮을 것 같다. 대체로 학생들에게 “패스를 좀 더 만져주세요, 곡선을 예쁘게 다듬어주세요” 정도로 적당히 뭉뚱그려서 말하곤 하지만, 때때로 좀 더 세밀하게 말해야 하는 상황은 있기 마련이고, 그럴 때는 핸들(조절점)의 비율을 맞춰달라거나, 특정 비율로 수정해보도록 권유한다.
한글 부리 글자의 획 모양을 살펴보면 대체로 획의 외곽에 해당하는 부분은 부리나 맺음, 꺾임 등 ‘무게추’ 역할을 할 만한 장치를 달아 시선이 쉽게 들거나 빠지는 것을 막는다. 이를 8가지 방향으로 나누어 보면, 이 중 시선이 드나들도록 설계된 곳은 2번, 4번, 5번이다. 이곳에는 무게추의 역할을 수행하는 장치가 없다. 물론 세로쓰기의 영향을 고려하면 아래로 시선이 흐르는 것은 자연스럽다고 볼 수도 있으나, 같은 세로쓰기 문자인 한자를 살펴보면 대체로 5번 방향에 무게추를 놓아 시선을 막는 경향을 보인다.
왜 이런 차이가 나타나는가? 여러 요인이 작용하겠지만, 그중 한 가지 가설은 한 글자로서 의미가 완결되는 한자(표의문자)는 그 끝을 맺어주고, 낱글자 하나로 의미가 완성되지 않는 한글(표음문자)은 연결성을 중시한 것이 아닌가 추측한다.
타이포그래피는 그 용어에서부터 알 수 있듯이 이론의 많은 부분이 외국에서 비롯되었다. 그래서 이론이 라틴 알파벳을 기준으로 작성된 경우가 많고, 한글에 적용하려면 다소 초점을 잡아주어야 할 경우가 생긴다.
대부분의 경우, 시각 보정은 한글이 합자라는 사실을 고려해서 설명하고 있지 않다. '를'을 예시로 들어보자. 첫 닿자 'ㄹ'의 맺음을 키울 것인가 줄일 것인가? 이 경우 두 가지 선택지가 발생한다.
첫 번째, 낱자(ㄹ)의 관점을 좀 더 반영해서 작업한다면 맺음이 커져야 한다. 하나의 조형에서 외곽, 마무리에 해당하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이 감각은 글을 다 쓴 뒤 마침표를 찍는 감각에 가깝다.
두 번째, 낱글자(를)의 관점에서 시각 보정을 수행한다면 맺음은 작아져야 한다. 이는 하나의 조형(를)의 중심부에 위치하기 때문이다. 맺음을 키우던, 줄이던 둘 다 나름대로 이유가 있는 결정이고, 어떤 결정이 단순하게 나쁘다고 말할 수 없으나, 하나의 글자가족 안에서 이 관점이 이유없이 흔들린다면 좋은 글꼴이라 말하기는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