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자 디자인 2주 차는 선에 대해서 배운다. 2024년 2학기부터는 회오리 그리기 실습을 새롭게 추가했다. 가장 힘든 실습이 무엇일지 신나게 고민한 결과로 회오리를 선택했다. 회오리는 특정 방향으로 곡선이 점점 커지기 때문에 양쪽 조절점의 위치가 다르다. 그래서 펜 툴로 한 번에 그려낼 수 없다. 고정점 위치를 대략 설정해서 회오리 모양을 얼추 그린 다음, 고정점의 간격과 위치를 새롭게 정렬해야 한다. 그리고 곡선을 다듬어 마무리한다. 회오리의 모양이 잘 잡혔다면, 마지막으로 각 조절점의 위치가 적절한지 검산할 수 있다. 곡선에 대한 분석, 설계와 도구 활용, 그리는 솜씨가 차례대로 요구된다. 이미지는 학생 작업을 보정한 것. 여기서 좀 더 완벽해지려면 고정점 위치에도 축을 추가하는 것이 좋다.
강인구: ‘이칠팔공’은 하나의 글꼴을 완성하는 것을 목표로 디렉팅부터 시작해 글꼴 제작, 판매까지 이어질 수 있도록 기획한 프로젝트다. 김태룡 디자이너와 함께 각자 수강생을 두고 진행하고 있다.
이건하: 수업은 어떤 방식으로 진행되고 있나?
강인구: 수업 방식에 대해 고민을 많이 했다. 글꼴 제작에 대한 부분에서 디렉터가 얼마나 관여할지, 제작 기간은 얼마나 걸릴지 등 고려할 만한 부분이 많이 있었다. 그리고 글꼴을 실제로 판매하기까지 수요가 얼마나 있을지 모르니, 수업료를 선불로 받고 시작하기엔 부담스러울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일종의 계약 방식으로 진행이 됐다. 글꼴을 완성한 후, 판매한 수익의 일정 비율을 받는 형태로 계약을 정리했다. 그리고 수익에 대한 지급 한도를 설정했다. 지급 한도는 개인마다 조금 차이가 있는 편이다. 개인의 이해도, 글꼴의 난이도, 형태에 따라 계약 방식이 조금씩 다를 수밖에 없기 때문에.
김태룡: 예를 들면 본문용이라던가.
강인구: 그렇다. 본문용 같은 경우 짧으면 2년, 길면 3년까지 지속해서 수업을 이끌어야 한다. 그래서 그에 대한 수요와 난이도도 다른 기준으로 봐야 한다. 비교적 빠르고 가볍게 접근할 수 있는 조합식 글꼴과는 다르다.
김태룡: 계약서를 어떻게 써야 할지 고민을 많이 했다. 예를 들어 글꼴의 저작권은 누구 앞으로 설정할 것인지, 판매 수익은 어떻게 분배할 것인지, 지급 한도는 어떤 범주로 결정하면 괜찮을지 등 균형을 맞추는 것이 쉽지 않았다. 이 중 글꼴 저작권은 창작자가 온전히 가져가는 것에 나와 강인구 디자이너 모두 동의했다. 글꼴은 몇 년 가까이 긴 호흡으로 작업하고, 결국 직접 글자를 그린 사람은 작업자이므로, 글꼴에 대한 권리는 직접 그린 사람이 가져가야 한다고 생각했고, 독점 유통 기한도 설정하지 않기로 합의했다.
이건하: 두 분이 글자 디자이너로 지내온 경험으로 미루어 봤을 때 가장 적합한 형태의 계약 방식을 찾은 것인가?
김태룡: 그런 과정이다. 지금도 조금씩 계약 방식을 조절하고 있다. 후불 개념으로 판매 후 수익을 나누는 계약의 형태를 만들고 수업을 운영했다. 수익을 나누긴 하지만 일정한 한도 금액을 정한다.
이건하: 그렇다면 글꼴 모임이라기보다 클래스에 가까운 형태라고 봐야 하나?
강인구: 여전히 얘기하고 있는 지점은 있다. 우리가 이걸 지속할 수 있을지에 대한 논의도 계속하고 있다. 서로 좋은 작업 환경을 구축하자는 생각으로 만든 시스템이지만, 강제력이 없다 보니 기존 계획한 일정보다 늘어나는 경우도 있고, 완성을 어려워하는 경우도 생긴다. 글꼴과 관련된 기초적인 내용부터 작업 도구, 기획, 크라우드 펀딩, 제작, 유통까지 전반적인 모든 상황을 점검하다 보니 예상치 못한 수고가 발생한다.
이건하: 수업에서는 두 분이 함께 디렉팅을 맡고 있는지?
김태룡: 아니다. 수업의 형태를 같이 고민했지만, 실제 진행은 각자 진행하고 있다. 피드백이 섞이거나 양쪽에서 서로 다른 방향으로 얘기하는 것은 좋은 방법이 아니다. 어느 정도 완성이 되면 중간에 한 번씩 다 같이 모이는 자리를 만든다.
강인구: 어느 정도 기획과 형태가 나오고, 글꼴을 살펴볼 수 있는 최소한의 문장이나 단어들이 만들어져 있을 때 공유하기도 한다. 일정이 맞을 경우엔 크라우드 펀딩 전에 다 같이 모여 피드백을 주고받는다. 각자 진행하는 수업의 역할을 존중하는 편이고, 피드백은 열어놓고 진행하는 편이다.
이건하: 수업을 진행할 때 특히 중점을 둔 부분이 있는지 궁금하다.
강인구: 글자를 그릴 때, 그리는 방식에 대해 정확한 질서를 구축하고 진행해야 한다. 그래서 작업을 할 때 질서에 대한 강조를 많이 했고, 그 질서를 설정하는 방법에 대해서도 오래 이야기를 나눴다. 지금도 힘들어하는데, 워낙 콘셉트가 강한 글자라 기획 의도와 콘셉트가 한 몸처럼 보여야 하므로 이 부분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다.
김태룡: 앞서 말한 부분도 물론 중요하고, 또 덧붙이자면 이 작업의 결과물로 펀딩을 받거나 판매를 해야 하기 때문에 어느 정도 차별화가 되는 세일즈 포인트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이건하: 판매 쪽에 중점을 두고 있는 것인지?
김태룡: 그렇다. 더 새로운 형태라든가, 새로운 사용성에 초점을 맞추는 편이다. 실제로 판매가 돼야 상용화도 가능한 것이고 사람들이 사용하면서 꾸준히 노출되는 거니까. 글꼴을 계속 만들고 싶다면 판매에 대해서도 구체적으로 생각을 해봐야 한다. 1종 기준 300카피 이상 판매하는 것을 목표로 두라고 말한다.
민향기, ‘트로피컬’
이건하: 이번에는 글꼴을 완성하신 민향기, 이채림 두 분의 글꼴 이야기도 들어보고 싶다.
민향기: ‘트로피컬’은 아직 완성된 글꼴은 아니다. 사실 본문용 글꼴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도 있었지만, 첫 제작은 비교적 인상이 강하고 독특한 형태로 만드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제목용 글꼴을 만들게 됐다. 처음 스케치할 때 대비감을 통해 신나 보이는 획을 그려보면서 안정된 형태를 찾아나갔다. 조금씩 붙이고 빼면서 정리를 하다 보니 글자가 점점 활력 있게 느껴져서 ‘트로피컬’이란 이름을 붙이게 됐다. 이름을 붙이고 나니까 그다음부터 수월해진 것 같다.
이건하: 혹시 이름을 붙이는 것만으로 글자를 그리는 작업에 영향을 미쳤는지?
민향기: 그렇다. 아무것도 정해지지 않았을 때는 형태의 기준을 찾기 힘들었는데, ‘트로피컬’이라는 이름이 생겨난 후 콘셉트와 형태를 만들어 나가는 과정이 전보다 덜 까다로워졌다. 이때부터는 한글 글꼴의 필수적인 규칙과 콘셉트를 지켜나가며 글자를 그려나가기 시작했다.
강인구: 두 분 다 레터링 경험이 꽤 있으신데, 레터링에서 느껴지는 흥미로운 표현을 컨셉추얼한 글자로 그려보자는 가벼운 시작이었다. ‘트로피컬’ 같은 경우 획 변화가 중점이었는데, 진행하면서 획 사이 폭과 변화에 더 신경을 썼다. 그러다 보니 획 변화의 정도마다 어떤 재미가 있을지 혹은 어떤 인상을 보여줄 수 있는지 고민하면서 재미있고 활기찬, 밝고 명랑한 느낌으로 정해졌다. 그리고 어울리는 글꼴 이름을 짓는 도중 몇 가지 안이 나왔고, 여름에 느낄 수 있는 활기를 보여주려 했다. 어떤 획이 더 밝고 활기찬 형태인지, 너무 정적이거나 진지하지 않는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런 과정을 통해 글꼴은 차별성을 가진다고 생각한다.
이채림: ‘앙버터’는 귀엽고 획이 굵은 부리 글자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에서 시작했다. 처음부터 정확한 콘셉트를 잡고 시작한 건 아니었고, 막연하게 어떤 표현을 넣고 싶었다. 스케치를 하던 중 앙버터를 먹고 있어서 앙버터라는 글자를 그렸더니 인구 님이 ‘이거 앙버터 같은데요.’ 라고 하셨는데, 듣고 보니 마음에 들기도 했고 의도했던 콘셉트와 어울릴 것 같아 그렇게 쭉 진행을 해왔다. 그렇게 앙버터의 맛과 식감, 생김새를 특징으로 뽑아 글자에 표현했다.
이채림, ‘앙버터’
강인구: 덧붙이자면, 두 분의 진행 방식은 조금 달랐다. ‘트로피컬’같은 경우 외관상의 형태가 빠르게 정해졌다. ‘앙버터’는 기획이 빠르게 정리된 반면, 그 기획을 글자 형태로 구현하는 과정에서 난이도가 높았다. 일단 곡선이 굉장히 많은 글자이고, 곡선이 많다 보니 그 곡선을 다루는 방식을 이해하고 터득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렸다. 그리고 ‘앙버터’를 단순한 시각적 해석에서 벗어나 꾸덕한 식감의 정도, 맛과 질감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지 의논했다. 그 정도에 따라 곡선과 형태를 다루는 방식이 달라졌다.
이건하: 글꼴 제작 툴에서 핸들을 잡고 곡선을 다루는 방식에 대한 이해와 숙련도가 필수적인 것 같다.
강인구: 그렇다. 쉽게 말해서 노드는 형태를, 핸들은 곡선을 만드는 데 사용한다. 하나의 곡선 패스를 만들 때 위, 아래 노드를 2개 찍고 양옆으로 핸들을 4개 뽑을 것인지, 아니면 위, 아래, 왼쪽, 오른쪽, 4개의 노드를 찍고 핸들을 4개나 8개를 뽑을 것인지에 따라 표현할 수 있는 곡선이 달라진다.
이채림: 그 곡선의 정도가 진짜 어려웠다. 이해가 되는 것 같다가도 곡선을 조정하는 방식에 따라 텐션감도 달라지고, 그거를 다 통일되게 맞추는 것도 어려웠고.
이건하: 그게 왜 어려운 작업인지 설명해 줄 수 있나?
강인구: 핸들과 노드에 따라 곡선 패스가 얼마나 달라지는지 감을 잡기 어렵기 때문이다. 핸들과 노드 사이 거리가 곡선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알 수 있다면 형태를 예상할 수 있어서 수월하다. 핸들이 노드에서 멀어지는 비율만큼 형태가 날카로워지거나 둔해지기도 하고, 탄탄한 곡선으로 보이거나 물렁한 곡선으로 보이기도 한다. 이런 부분을 이해하는 데 시간이 걸렸다.
이건하: 이론적으로 명확하게 이해하고 툴을 다루는 훈련이 꾸준히 이어지는 게 중요한 것 같다. 마지막으로 원호 님의 작업 설명을 부탁한다.
박원호: 이 글꼴의 시작은 앞 두 분과 조금 달랐던 것 같다. 교내 동아리에서 스터디로 진행했던 레터링 작업이었는데, 객관적인 피드백이 없이 빠른 시간 내에 완성했었다. 당시 도시라는 주제를 가지고 일주일 정도 진행했던 작업이고, 단순히 도시를 떠올렸을 때 그 모습을 적합하게 표현하는 게 무엇일지 고민하다 아파트가 떠올랐다. 아파트가 가진 수직적이고 선이 굵은 형태에서 착안해 속공간이 많이 눌린 듯한 레터링을 만들었다. 그 후, 소장각에서 진행하는 워크숍에서 이 레터링을 글자로 확장시키고 싶다는 욕심이 들었다. 처음엔 여섯 글자(아파트공화국)만 진행했다가 추가로 한 문장 정도 만들어 봤는데, 글꼴로 확장하는 것도 가능할 것 같아서 지금까지 진행해 오고 있다. 이 글꼴에서는 핸들을 만지는 것보다 글자 사이 빈 공간을 조정하는 게 나에게는 더 어려운 작업이었다.
박원호, ‘아파트공화국(가제)’
이건하: 글꼴 이름은 아직 미정인가?
박원호: ‘아파트 공화국’이라는 레터링으로 시작되긴 했지만 이걸 그대로 가져갈지는 모르겠고 아직 모든 게 미정인 상태다.
이건하: 원호 님은 초기 단계이긴 하지만, 세 분의 글꼴 제작 소감도 들어보고 싶다.
민향기: 학과 내 타이포그래피학회에서 레터링만 하고 있었는데, 글꼴을 만들어 봐야겠다는 생각만 해오다 이번 기회에 완성까지 하게 되어 일단 뿌듯하다. 직접 그린 자음, 모음이 그 자리에서 타이핑을 하면 화면에 딱 나오는 게 너무 신기하기도 했다. 이전에는 글자를 그리면 시스템에 통용되는 언어 체계가 아니라 단순한 시각적 모양이나 도형으로만 구현되었는데, 이제는 도형과 시스템이 결합해 하나의 글꼴이라는 위치에서 작동하는 것이 흥미로웠다.
김태룡: 글꼴을 크라우드 펀딩 사이트에서 오픈하고 후원을 받았는데, 펀딩 성공 후 심정을 들어보고 싶다. 이후 반응에 대한 생각도 궁금하고. 실제로 사람들의 반응이 후원 금액과 같은 형태로 나타나니까 드는 생각이 있을 것 같다.
민향기: 사실 이렇게 판매 수치를 바로 보여주는 플랫폼에 올린 건 처음이라 뭔가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이채림: 펀딩 오픈하고 나서 첫날 열리자마자 반응이 되게 좋았다. 주식처럼 계속 새로고침을 하면서 10분에 한 번씩 들어가게 되는… 너무 신기해서 계속 들여다보게 되더라. 일단 뿌듯한 마음이 가장 크다. 작업 초기 글립스 파일을 열어보면 노드와 핸들도 너무 못 썼고 형태도 못생겼다고 느끼는데, 지금 하는 걸 보면 글자도 많아졌고 형태도 이전보다 잘 다듬어진 부분이 보인다. 그리고 레터링과 글꼴의 차이를 확실히 알게 되었고, 이번 기회를 통해 좋은 경험을 했다고 생각한다.
이건하: 진행 중인 원호 님의 생각도 들어보고 싶다.
박원호: 레터링은 한정된 글자 안에서만 조형성을 고려하면 되는데, 글꼴로 제작해 보니 고려해야 할 경우의 수가 엄청 방대해지고 예상치 못한 곳에서 문제점이 많이 나왔다. 임의로 정한 규칙성에 대해 시각 보정하는 과정이 제일 어려웠던 것 같다. 지금도 그런 공간에 대한 세밀한 조정이나 시각 보정을 해가고 있는데 아직 보는 눈이 없어서 그런지 쉽지 않다.
김태룡: 경험상 가르쳐 보면 미리 알려주는 거는 소용이 없더라. 본인이 겪어봐야 알게 되는 것 같다. 옛날 작업을 1년 뒤쯤에 보면 이상함을 느끼게 마련이다. 스스로 그걸 보고 느끼기 전까지는 옆에서 가르쳐 준다고 볼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조금 시간이 걸리더라도 어쩔 수 없는 부분은 있다. 그렇다고 계속 따라다니면서 간섭하다 보면 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하기 싫어질 수도 있고. 전체 글자를 모두 그려보면서 파악해야 보이는 부분도 있기 때문에, 처음부터 욕심을 낼 수는 없다.
이건하: 향기 님과 채림 님은 글꼴을 거의 완성하셨는데 만들면서 어려웠던 점이나 인상 깊었던 글자가 있었는지?
민향기: 사실 어려운 걸 뽑으라면 너무 많다. 앞서 계속 나왔던 것처럼 한글 만들 때 기준을 잡는 게 정말 어려웠다. 인상이나 콘셉트가 정해졌더라도 그에 맞는 첫닿자 크기라든가, 아니면 받침 크기나 위치, 이런 거를 결정하는 게 힘들었다. 아직도 계속 수정 중이고 아마 많이 바뀔 것 같다. 그리고 펀딩 사이트에 올릴 이미지 만드는 것도 어려웠다. PR을 해야 하고 설명을 잘 해줘야 하는 이미지인데, 콘셉트와 의도를 이미지에 담아 전달해야 하는 점이 쉽지 않았다. 내 의도와 다르게 전달될 수 있고 객관적으로 내 글꼴이 어떻게 보일지 판단하기가 어려워서 이미지 만드는 데 거의 글립스를 사용한 만큼 시간을 쓴 것 같다.
이건하: 구매하는 사람이 이해하기 쉽고 매력적이게 느낄 수 있도록 간략하게 정리해서 만들어야 하니까 쉬운 일은 아니다. 이 부분은 태룡, 인구 님도 공감하는 부분인가?
김태룡: 펀딩을 위한 이미지 만들 때 글자를 올리고 나면 그 글자의 결점이 갑자기 보이기 시작한다. 그러면 고치고 다시 이미지 만들고, 근데 또 보이고. 그러다 보면 일주일씩 더 걸리는…
민향기: 처음에는 되게 쉽다고 생각했다. 한 2주면 할 줄 알았는데 정말 오래 걸렸다.
강인구: 이게 오래 걸릴 걸 예상하니까 빨리 시작해야 한다고 말했었는데 두 분이 길게 잡아도 한 달이면 된다고 하셔서 어떻게 만들어 오는지 기다렸다.
이채림: 남들이 봤을 때 사고 싶은 마음이 들어야 할 것 같은데, 이걸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인구 님에게 피드백을 받으면서 진행했는데, 볼 때마다 수정 사항을 많이 보내주셨다. 수정사항을 보기 전까지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부분이었다. 글자를 만들 때도 인구 님에게 여쭤보기 전까지 이게 맞는 건지 틀린 건지 혼자 판단하는 게 힘들었다. 한 글자를 만들 때도 완성이 무엇인지, 도대체 어디서 멈춰야 하는지도 모르겠고 얼마나 수정을 해야 하는지 그런 게 좀 어려웠던 것 같다. 그리고 인상 깊었던 글자는 피읍. 글자를 그릴 때 한 네 번 정도 수정하고 형태를 아예 바꿨다. 강인구 덧붙여 말씀드리면 여러 번 바뀌었던 이유가 글자 형태를 쓰기로 가져갈 것인지 아니면 앙버터만의 질감으로 만들 것인지에 대한 부분 때문이다. 쓰기를 기준으로 형태로 잡으면 두께가 있어서 공간이 나오지 않는다. 형태가 다 표현될 수 있는 공간이 제한적이었고, 직선으로 획을 그리면 다른 글자처럼 질감이나 인상이 나타나지 않아서 어떻게 해결하면 좋을지 고민을 많이 했다. 피읖만 그런 건 아니고 꽤 여러 글자가 그런 과정을 겪었다. 전반적으로 컨셉추얼한 글자를 그린다는 건 이런 부분에서 굉장히 많은 노고가 들어가는 편이다.
강인구: 배우는 입장에서 글꼴에 존재하는 질서를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게 가장 힘들 것으로 본다. 자소가 하나 달라지는 것만으로 완전히 다른 질서가 생성되거나, 자소 형태에 따라서도 질서가 달라지니까. 이런 것들을 이해시키는 부분이 어렵고 힘든 지점 같다. 그리고 제작뿐만 아니라 판매가 될 수 있는 포인트를 잡아주고, 판매까지 이어질 수 있도록 설계하는 것에 부담과 책임을 느끼고 있다.
이건하: 글꼴 제작부터 판매나 유통까지 다양한 부분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 흥미롭다. 태룡 님의 생각은 어떠한가?
김태룡: 일단 도망 안 갔으면 좋겠다. 실제로 하다가 중도 포기하는 경우가 많이 있기 때문. 레터링 클래스나 서른 글자 정도만 만든다고 하면 거기까지는 너무 즐겁고 재미있는 시간인데, 이걸 완성까지 한다는 건 그 외적으로 깔려 있는 어려운 부분들도 전부 건드려 보는 거라 중간에 질려하는 경우도 꽤 있다. 특히 평소 안 쓰던 문장 부호나 글자 같은 경우는 낯설고 어렵기 때문에 그런 부분들도 잘 마무리를 해줬으면 한다. 또 마찬가지로 세일즈가 매우 중요하긴 한데, 그래도 뭐 망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조금은 열어두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이건하: 모든 글자가 완성이 된다고 해서 글꼴로 잘 팔리고 잘 쓰이는 건 아니니까?
김태룡: 아직 그런 사례는 없지만, 1년에 한 종도 안 팔리는 글꼴이 생기면 어쩌나. 그런 고민도 했었다.
이건하: 글꼴을 만드는 것 자체가 굉장히 어렵고 고된 일이긴 하나 완성된다고 반드시 판매된다는 보장이 없다는 게 참 힘든 작업이라고 느껴진다. 이제 수강생 세 분께 질문 드릴텐데, 이후 제작해 보고 싶은 글꼴이 있다면 알려 달라. 단순히 구상 중인 글꼴도 괜찮다. 그리고 글꼴 제작을 배우고 있는 이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민향기: 일단 제목용으로 판매까지 해봤으니까 본문용 민부리 글꼴을 만들고 싶다. 본문용 글꼴이 글자 공부에 도움이 많이 된다고 알고 있어서 생각해 보고 있다. 그리고 졸업 전시에 응용할 수 있는 실험적인 글자도 만들고 싶다. 비교적 글리프 수가 적은 라틴 타입으로. 글꼴 제작을 배우는 분들에게 도움이 되는 말을 해드리자면 극점을 활용해 모양을 깔끔하게 다듬고 불안정해 보이지 않게 만드는 훈련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 글자 외에도 다른 그래픽 요소를 만드는 데 충분히 응용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이채림: 마찬가지로 본문용 글꼴을 만들어보고 싶은데, ‘앙버터’와 달리 점잖은 인상의 제목용 글꼴도 한 번 더 만들어보고 싶다. 펀딩을 올릴 때쯤에는 너무 힘들어서 다른 글꼴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런데 계속하다 보니 정말 보람 있는 작업이고, 글리프가 하나하나 채워지면서 성취감도 느껴지는 작업이라 앞으로도 쭉 해보고 싶다. 그리고 향기 님이 말해주신 것처럼 글꼴 제작을 공부하고 있다면 곡선 다루는 법과 노드, 핸들 다루는 법을 열심히 훈련하면 좋지 않을까. 그게 곧 완성도를 좌우하는 것 같아서 알아두면 정말 도움이 많이 된다. 그리고 나에게 일어난 일은 아니지만 파일 관리를 잘 해두어야 한다.
이건하: 파일이 날아가거나 유실되는 상황을 말하는 건가?
강인구: 한 번 그런 일이 있었다.
이채림: 향기 님이 너무 힘들어해서 마음이 아팠다.
민향기: ㅠㅠ
이건하: 안 그래도 호흡이 긴 작업인데 그런 사고가 생기면 더 딜레이되니까. 마지막으로 원호 님도 말씀 부탁드린다.
박원호: 당장 구상 중인 글꼴은 없는데 두 분과 비슷한 것 같다. 사실 글꼴을 만든다는 건 디자이너가 하나쯤 가지고 있는 야망이 아닐까? 본문용 글꼴을 나만의 것을 만들겠다는 욕심은 있는데, 아직은 막연히 해보고 싶다는 마음만 가지고 있다. 앞으로의 계획은 두 분과 다르게 아직 걸음마 단계라 많이 배워야 하고 안목을 기르는 중이다. 그리고 글자를 다룬다는 게 어떻게 보면 모든 디자이너가 필수적으로 가져야 하는 소양인 것 같아서, 단기간 내에 글자를 보는 안목을 기르려면 글자를 직접 디자인해 보는 게 좋은 것 같다. 주변에 글자를 만들고 싶은 친구들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시도라도 해봤으면 좋겠다. 학교에서 하기 어렵다면 당장 학교 밖으로 나오기만 해도 글자에 관심 있는 분들이 굉장히 많다. 단 몇 문단 정도라도 글자를 만들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다들 시도는 해봤으면 좋겠다.
이건하: 세 분의 글꼴 제작으로 시작한 ‘이칠팔공’의 수업 방향과 목표가 있다면 말해 달라.
김태룡: 다들 이제 하나 끝내 봤으니까 두 번째 프로젝트를 했으면 좋겠다. 우리가 진행하는 수업에서는 처음부터 높은 단계를 요구하지 않는다. 제목용이라든가 만들기 쉬운 조형을 유도하는 편인데, 자칫 거기서 매몰돼서 그걸 반복하지는 않았으면 한다. 앞으로 조금씩 더 어려운 것들을 하나씩 경험해 보면 좋겠다.
강인구: 몇 주짜리 강의로 글꼴 한 벌을 완성한다는 건 매우 어려운 일이다. 이 강의를 하는 이유는 강의를 듣고 글꼴을 완성해 보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한 벌의 글꼴을 완성하는 데 도움을 주고 싶다는 생각이 기반이었던 것 같다. 태룡 님이 말해주신 것처럼 이 프로젝트가 끝나더라도 더 좋은 글꼴을 만들기 위해서 스스로 노력해 봤으면 좋겠다.
이건하: 이제 마지막 질문이다. 각자 기획 중인 프로젝트나 글꼴, 혹은 진행 중인 작업이 있나?
김태룡: 2023년 초에 공개했던 ‘산작’이라는 글꼴을 고정 폭으로 다시 리뉴얼해서 진행하고 있다. 논문으로 낸 내용도 있어서 학술지 발행이 늦춰지지 않는다면 올해 6~7월 정도에 공개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김태룡, ‘한글 조판에서 「홑낫표」와 『겹낫표』의 너비 설정에 대한 고찰’
이건하: 졸업 논문으로 이어지는 것인가?
김태룡: 일단은 소논문이다. 분각 개념에 관심이 있어서 이 개념을 응용해 글꼴에 모듈 형식으로 적용하기 위해 제작과 설문조사, 그리고 실제 사용까지 이어질 수 있도록 연구 중에 있다.
이건하: 인구 님은 어떤 작업을 하고 계시는지?
강인구: ‘긱산스’라는 작업을 해오고 있는데, 2년 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해 작업하고 있다. 민부리 글자에 여러 가지 기능들이 들어간 글꼴이다. 오픈타입 피처라는 기능이 있는데, 몇 가지 클릭만 하면 자동으로 자소가 바뀐다든지, 글리프가 대체된다든지 하는 기능들이다. 이를 한글에 적합한 오픈타입 피처 기능으로 정리하고, 최대한 많은 기능을 지원하는 글꼴 가족을 만들어보는 것이 목표라 ‘긱산스’에 오픈타입 피처 기능을 최대한 많이 정리를 해서 넣고 있다. 글꼴을 출시하면 항상 가이드북을 만드는데, 가이드북에 오픈타입 피처 기능이나 정보가 실릴 예정이다. 또 그 안에 다국어도 어느 정도 쓸 수 있게끔 유럽 언어와 일본어, 이런 것을 포함해 글꼴을 만들고 있다.
이건하: 그렇다면 아시아 문자를 다루는 것에 초점을 맞춘 형태일까?
강인구: 그렇다. CJK의 많은 부분을 쓸 수 있게끔 하고 싶은데, 문제는 한자 쪽이다. 그리고 아시아 문자뿐만 아니라 라틴 알파벳이나 숫자에서 모노 스페이스라고 하는 고정폭 글자를 오픈타입 피처 기능을 활용해 쉽게 대체할 수 있도록 해보려 한다. 목표는 올해 안으로 끝내는 건데 얼마나 걸릴지 모르겠다. 지금도 계속 추가되고 있는 기능들이 있어서 확실하게 가늠이 안 되는 상태다.
이건하: 두 분 다 글꼴에 대해 말씀해 주셨는데 제작한 글꼴이 사이트에서 판매가 되는 형태인가? 판매 경로나 그런 것들을 예상하는 곳이 있는지?
강인구: 일단 완성하면 지금 태룡 님이 운영하고 있는 ‘11172.kr’에 올라간다. 크라우드 펀딩 여부는 고민 중이다.
산작은 가변폭으로 설계했다. 고정폭으로 수정하려면 획이나 동세의 흐름을 포기하고 아무래도 글자틀에 맞게 넓히고 균등하게 재배열하는 과정을 거쳐야 하는데, 이를 바로 시도하기엔 부담스러웠다. 산작을 수정하고 있던 당시에도 디자이너들 입장에선 고정폭 글꼴로 본문을 조판하는 것이 익숙하고 편안할 것으로 예상은 했다. 그래서 시험삼아 산작을 고정폭으로 몇 글자 만들기 시작했다. 균형은 산작에 기반하지만, 가로로 조판하기에 좀 더 적합하게 수정했다. ‘를’과 같은 세로모임꼴 글자는 보를 좁히고, 글자높이는 일정하게 압축했다. ‘김’과 같은 가로모임꼴 글자는 고정폭 너비에 맞춰서 글자너비를 확장했다. 부리, 인상을 좀 더 날렵하게 변경하면서 획 설계도 3-10유닛 가늘게 바꿨다. 가능하면 24년에는 출시하려고 한다.
11172.kr은 2022년부터 운영하기 시작했다. 세부적인 기능 구현은 옥이랑 디자이너의 도움을 받았다. 내가 만든 글꼴을 판매하려고 만들기 시작했지만, 주변의 글꼴 디자이너들도 함께 판매할 수 있도록 자리를 만들었다. 가급적 품이 들지 않도록 시스템을 구축했고, 문의를 할 만한 부분도 미리 정리했다. 유지비용을 최대한 줄였기 때문에 입점 수수료도 10%로 책정했다. 이 정도가 적정한 기준이라고 본다. 이번 여름에는 글자디자인에 관심 있는 분들을 위해서 글립스 사용법과 레터링 관련 모임도 진행해 볼까 한다. 언젠가는 한 벌의 글꼴을 완성해 오길 기대하면서. 쉽지 않은 환경이지만 한글 글꼴 유통이 건강하고 활발하게 이루어지길 희망한다.
어도비 일러스트레이터의 모퉁이 위젯은 업데이트된 이후 도형을 작도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는 기능 중 하나다. 손쉽고 빠르게 모서리를 굴리거나 둥글게 만들 수 있어서 다양하게 활용된다. 최근에는 이 모서리에서 기계적인, 천편일률적인 곡률이 싫을 때가 있어서 살짝 변형한 곡선을 사용하곤 한다. 모서리 하나하나씩 수정하는 순간 작업시간은 당연히 몇 시간이 늘어난다. 툴이 발달해도 여전히 개인의 기호와 취향을 반영할 곳을 찾기 마련이다.
산작을 제작하면서, ‘ㅜ’와 ‘ㅇ’이 만날 때나 ‘ㅎ’의 경우 상투는 없애거나 정리하지 않고 서로 일정하게 겹치는 정도로 처리했다. 낱글자에 따라 있는 경우도 있고, 없는 경우도 있다. 낱자가 결합하는 한글의 특성상 “겹침“이라는 단어는 꽤 오랫동안 머릿속에 머물러있던 개념이기도 하다. 상투는 ‘ㅇ’의 조임을 강조하는 역할을 하기도하고, 속공간과 낱자 면적을 조율하는 장치로도 기능한다. 상투 없이 밋밋한 ‘ㅇ’을 가진 글자 균형을 조율하다 보면 결국 어느 지점에서 속공간이 눈에 걸리는 곳들이 생겨나곤 한다.
무엇인가 매끈하게 다듬는 것이 디자이너의 본능이라 그런 것일까?, 디지털 환경에서 복사, 붙여넣기가 손쉬워서 그런 것일까? 혹은 둘 다인지 모르겠지만 한글의 이런 '턱'들은 너무 고민 없이 밀려버리거나 조합별로 통일되어 버리곤 했다.
숙련된 글자 디자이너들은 대부분 선 다루는 게 굉장히 익숙해서 조형만 봐도 어떻게 점을 구성했는지 역산이 가능할 텐데, 최근 몇 년간 수업을 진행하는 학생들을 대상으로 테스트를 해보곤 했다.
선으로 이루어진 글자를 A4용지에 출력해서 앵커포인트와 핸들포인트를 필기구로 표시하도록 했다. 벡터그래픽의 기반이 되는 베지에 곡선을 잘 체화하고 있는지 테스트해본 것인데, 의외로 꽤 많은 학생들이 핸들포인트를 반대로(...) 구사하는 경우가 있어서 꽤 놀랐다. 생각해보면 펜 툴을 다룰 일은 점점 줄어들고 있고, 누군가 만든 소스를 활용하고 배열하는 것만으로 결과물을 만드는 일이 많아졌다. 도구와 AI가 발전할수록 이런 일이 많아질 텐데, 기본기를 어떻게 다듬을지 고민이 드는 지점이기도 하다.
스스로 표시한 후에는 고정점과 조절점이 표시된 종이를 받아 자신이 작성한 종이를 비춰볼 수 있도록 했다. 조절점의 강약이 틀린 건 괜찮지만, 방향이 틀린 것은 베지에 곡선이 구현되는 원리에 대해서 다시 한번 되돌아보면 좋다.
고정점만 표시한 이미지
고정점과 조절점을 함께 표시한 이미지. 펜 툴을 다루는 것에 익숙한 디자이너라면 조절점의 위치에 따라 곡선이 어떻게 변화하는지 예측할 수 있을 것이다.
붓글씨를 시작하면서 처음 배우는 원칙 중 하나가 한 획에 한 번 이상 손대지 말라는 것이다. 나이가 어린 학생들은 종종 멋진 글씨를 쓰고 싶은 마음에 획을 몇 번씩 덧칠하기도 한다. 그러나 한 획을 두 번 긋는 순간 좌우에 미묘한 어긋남이 생기고 만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디지털로 글자를 설계할 때도 대부분 한 획은 한 번에 그인 것처럼 솜씨 좋게 선을 다듬을 필요가 강제된다. 특히 ㅊ의 삐침을 이루는 왼쪽과 오른쪽 각각의 곡선과 같은 지점에서 그러한 특징이 잘 드러난다.
그런데, 한글 글꼴이 어려운 것은 세부적으로 파고들수록 이러한 원칙들이 상충하는 지점이 나타난다. 획의 일관성도 중요하지만, 속공간의 관점에서 낱글자를 바라보면 또 다른 지점이 있다. 산작을 설계하면서 속공간을 이루는 내곽의 선은 직선으로 설계했지만, ㄹ의 바깥선은 곡선으로 설계했다. 시선이 들어오는 외곽의 선은 곡선이 더 적합하다고 판단했고, 속공간을 이루는 내곽의 선은 직선을 적용하는 것이 적합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는 곡선에 비해 직선으로 속공간을 설계했을 때 글자가 더 시원하고 깔끔하게 보이는 효과를 노린 것이기도 하다.
또, 속공간은 글자를 세우는 골격 역할을 병행하므로 글자가 좀 더 단단하게 보이길 바란 것이기도 하다.
개인적으로 글꼴을 볼 때 4가지 기준을 가지고 따져본다. 1. 모작: 충분히 잘 베꼈는가? 2. 열화: 충분히 잘 못 베꼈는가? 3. 역설계: 사람이 편안하게 느끼는 요소들을 잘 이해하고 있는가? 4: 재조합: 읽어낸 요소들을 유기적인 맥락으로 잘 연결했는가?
새롭다는 것은, 기존에 없던 것을 발견하거나, 기존에 존재하는 것을 새롭게 조합하는 것이다. 글꼴 설계에서 새로운 것을 발견하는 것은 어렵다. 이미 수백, 수천 년간 사람들이 쌓아둔 데이터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기존에 존재하는 것들을 잘 분석하고, 이해하고, 새롭게 조합하는 것이 글꼴 디자이너가 창의성을 발휘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타이포그래피를 다루는 사람들 중에는 때때로 서예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경우가 있다. 기본적으로는 동의하지만, 목적과 수단을 혼동할 필요는 없다. 중요한 것은 서예 그 자체가 아니라 붓이 움직이는 원리, 사람의 몸이 움직이는 동선을 이해하고 다룰 수 있는 것이다. 서예가와 글꼴 디자이너 서로 이해하고 활용하는 영역이 다르다.
글꼴은 어떤 시각에서는, 글씨의 모조품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기술과 인식의 확장에 따라 가짜로 여겨지던 것이 원본을 대체하는 현상은 언제나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현재의 글꼴 디자인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을 글씨의 역설계 과정이라고 본다. 글꼴은 이미 오래전에 글씨의 영역을 일정 부분 대체할 만큼 편리했지만, 아직 글씨의 깊고 세밀한 부분들을 충분히 이해하고 분석한 상황은 아니라고 보기 때문이다.
글자체의 개성과 특징은 부리에 잘 드러난다. 그러나 글자체의 품질에 대한 판단이 필요한 경우, (물론 다양한 기준으로 판단해야겠지만) 우선 꺾임을 어떻게 설계했는지 살펴본다.
꺾임은 한번 뻗은 획의 기세가 정리되는 동시에 다음 지점으로 넘어가기 위한 디딤돌의 역할을 한다. 따라서 획의 길이, 각도에 따라 꺾임의 모양도 달라진다. 기역의 경우를 살펴보면 기운줄기가 45도 각도로 꺾이는 것부터 90도로 꺾이는 것까지 다양하다. 그에 따라 꺾임의 모양도 변화한다. 디자이너가 필기구와 신체의 구조, 움직임을 잘 이해하고 있어야 꺾임을 자연스럽게 설계할 수 있다.
그런데 글꼴 제작에 컴퓨터가 도입되면서 복사/붙여넣기가 쉬워졌다. 물론 압도적으로 장점이 많지만, 서로 달라야 할 낱자가 지나치게 비슷하게 그려지는 경향이 눈에 띈다. 심각하게는 획의 움직임과 관계없이 꺾임이 일괄적으로 똑같이 생긴 경우도 발견된다. 아무리 통일성이 강조되더라도 기역은 기역처럼 생겨야 하고, 니은은 니은처럼, 미음은 미음처럼 보여야 한다.
붓은 부드러운 털을 먹에 적셔서 쓴다. 그래서 만년필이나 연필, 볼펜 등 끝이 단단한 필기구에 비해 자유분방하고 강약조절에 장점이 있다. 물론 사용이 어렵고 오래 걸린다는 단점도 있다.
붓이 종이에 처음 닿는 부분을 기필, 혹은 입필이라고 한다. 부리를 말하는 것인데, 붓이라는 도구의 특징이 확고하게 드러나는 부분인 동시에 다양한 가능성이 정리되고, 앞으로 뻗어갈 획에 대한 준비를 마치는 곳이다. 종이에 붓을 대는 순간, 붓끝의 무수한 모와 먹을 가다듬는 것이다. 부리는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도구의 특징과 가능성이 단적으로 드러나는 부분으로, 작은 부분이지만 힘의 흐름이 다채롭게 녹아있기 때문에 곡선과 표현을 더 예민하게 다듬어야 한다. 특히 ‘빼’나 ‘ㅖ’처럼 부리가 많고 그 각도나 힘이 제각각 달라지는 경우 그 난이도는 수직 상승한다.
고딕의 시각보정은 두께와 길이, 높이를 중심으로 설계된다. 반면, 명조의 시각보정은 부리와 맺음의 크기를 중심으로 설계된다. 명조의 보(ㅡ)를 살펴보자. 보의 부리와 맺음은 왜 유독 크게 설계되어 있을까? 몇 가지 이유를 찾아보자. 첫 번째 설명은 낱글자의 외곽을 튼튼하게 만들기 위함이다. 그러나 이는 첫 닿자(자음글자)의 부리, 맺음과 비교해 크게 설계된 이유가 아니라 부리와 맺음의 역할 그 자체라는 점에서 제대로 된 설명이 아니다. 두 번째. 보(ㅡ)는 낱글자에서 가장 긴 획인 동시에 가장 힘찬 기세를 담은 획이므로 이를 반영한 것이다. 꽤 많은 부분이 설명되긴 하지만, 본질적으로 왜 사람이 글자를 쓸 때 보를 길게 쓰고, 그를 자연스럽게 여기는지 설명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한계를 보인다. 그렇다면 세 번째. 지금까지 찾은 가장 설득력 있는 설명은 이렇다. 조합되는 낱자(ㅌ/ㅡ/ㄷ)의 존재감을 비등하게 유지하기 위한 장치다. 보는 단 하나의 선으로 닿자(ㄱ-ㅎ)과 동등한 수준의 존재감을 가지려고 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하나 더. 홀자'ㅣ'와 'ㅡ'를 비교해보자. 대체로 세로기둥보다는 가로로 쓴 'ㅡ'꼴에서 부리와 맺음이 더 크다.
어도비 일러스트레이터 펜 툴로 작업할 때, 직선 다음에 이어지는 곡선의 핸들을 하나만 쓰는 경우를 꽤 자주 본다. 이렇게 작도하는 경우, 보이지 않는 핸들 포인트는 고정점의 영점에 숨어있다. 펜 툴로 선을 이어 그리면 자연스럽게 그렇게 유도되기 때문에 그런 듯하다. 좀 더 아름답고 균형잡힌 곡선을 구현하고 싶다면 핸들 포인트를 두 개 다 꺼내쓰라고 권유하는 편이다.
디자인이 완성되는 시점은 어디일까? 많은 책 디자이너는 책이 인쇄되어 물성을 획득하는 시점을 책 디자인의 완성으로 여기는 듯하다. 나 역시 종이에 인쇄된 글자를 볼 때, 데이터로만 존재하던 글꼴이 현실에 발을 내딛는 듯한 감정을 종종 느낀다.
그러나 글꼴 디자인은 그 결과물이 데이터인 글꼴(폰트)로 완성되는 일이고, 그렇기 때문에 완성의 시점은 어디인지 고민스럽다. 그런 과정을 몇 년간 거치다 보면 물성에 대한 집착이 어느 순간 데이터의 완결성에 대한 집착으로 바뀐다. 글자를 구성하는 점의 개수. 점의 위치. 곡선에 이르는 요소 하나하나가 논리적이라고 여겨질 때, 더는 설명하기 어려울 만큼 쪼개어놓았을 때, 데이터가 데이터 그 자체로 아름다운 순간에 집착하게 된다.
한편, 많은 툴에서 표준처럼 사용하는 글꼴의 기본 크기인 12포인트는 6분의 1인치, 1파이카를 포인트로 변환한 것이다. 72포인트는 1인치(=6파이카)를 변환한 것이다.
표 문자, 괘선 문자, 혹은 상자 그리기 문자(Box Drawings Characters)는 이름 그대로 상자나 표를 그릴 때 사용하는 문자다. 선이 조각된 글자를 하나씩 꿰맞춰 표를 그릴 수 있고, 대체로 도스(DOS) 운영체제나 초기의 게임 그래픽, 간혹 아스키 아트에서 볼 수 있다.
즉, 요즘처럼 그래픽 툴이나 표 그리기가 쉬운 환경에서는 정상적으로는 사용할 일이 거의 없는 문자고 처음 목적을 잃어버리고 표를 그릴 수 없게 만들어 놓은 글꼴도 있다. 게다가 자간, 행간이 딱 붙게 조절해야 하고 고정폭으로 설정해야 하니 이걸 써서 깔끔한 표 한 장 그리는 건 아주 골치아프다. 이놈을 이제 그만 문자 세트에서 빼야 하나 고민도 해보지만, 대부분의 글꼴 규격에 포함되어 있어서 안 그려 넣기엔 찜찜하다. 막상 그리기는 어렵지 않아서 사실 별 불만 없이 쉬어가는 시간 정도로 생각하며 그려 넣곤 한다. 대체로 표 문자는 선을 여백 없이 끝까지 채워 넣는 것이 일반적이다.
각각의 표 문자를 배열 중인 모습
각각의 표 문자를 조합하면 여러가지 표를 그릴 수 있다. 물론 현 시점에서는 더 편리한 방법이 많다. 엑셀이나 표 그리기에 특화된 프로그램이 아니더라도 대부분의 편집 프로그램에서 표 그리기 기능을 제공하고 있다.
어도비 일러스트레이터 툴은 대부분의 학교에서 기본적으로 제공하는 편이다. 그래서 학생들과 레터링을 작업할 때, 가르칠 때 사용하는 빈도가 점차 늘고 있다. 그런데 학생들에게 설명하려고 보니 앵커(anchor), 핸들(handle) 등 용어에서부터 소통이 막히는 일도 빈번하다. 어떤 경우는 외래어를 쓰고, 어떤 경우는 한글로 쓰는 부분도 조금 아쉬운 부분이지만 근본적으로는 세부적인 명칭까지 외우면서 작업하는 사례 자체가 드물기도 하다.
어쨌든, 용어는 조금씩 수정해나갔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는데 개인적으로는 일러스트레이터에 이미 적용되어있는 「고정점」은 아주 익숙하게 쓰고 있고, 「핸들」은 「조절점」 정도로 수정하면 좋겠다. 「패스」는 「선이나 곡선」 혹은 「경로」 정도로 바꾸면 괜찮을 것 같다. 대체로 학생들에게 “패스를 좀 더 만져주세요, 곡선을 예쁘게 다듬어주세요” 정도로 적당히 뭉뚱그려서 말하곤 하지만, 때때로 좀 더 세밀하게 말해야 하는 상황은 있기 마련이고, 그럴 때는 핸들(조절점)의 비율을 맞춰달라거나, 특정 비율로 수정해보도록 권유한다.
한글 부리 글자의 획 모양을 살펴보면 대체로 획의 외곽에 해당하는 부분은 부리나 맺음, 꺾임 등 ‘무게추’ 역할을 할 만한 장치를 달아 시선이 쉽게 들거나 빠지는 것을 막는다. 이를 8가지 방향으로 나누어 보면, 이 중 시선이 드나들도록 설계된 곳은 2번, 4번, 5번이다. 이곳에는 무게추의 역할을 수행하는 장치가 없다. 물론 세로쓰기의 영향을 고려하면 아래로 시선이 흐르는 것은 자연스럽다고 볼 수도 있으나, 같은 세로쓰기 문자인 한자를 살펴보면 대체로 5번 방향에 무게추를 놓아 시선을 막는 경향을 보인다.
왜 이런 차이가 나타나는가? 여러 요인이 작용하겠지만, 그중 한 가지 가설은 한 글자로서 의미가 완결되는 한자(표의문자)는 그 끝을 맺어주고, 낱글자 하나로 의미가 완성되지 않는 한글(표음문자)은 연결성을 중시한 것이 아닌가 추측한다.
이 과제를 통해 기초적인 복사, 정렬 도구를 실습한다.
다음 그림은 획수가 적거나 많은 글자를 단계 별로 단순화한 것이다. 1획에서 4획에 이르기까지 시각보정의 강도를 직접 조절해본다.
그림 1은 모든 획의 굵기가 같다.
그림 2는 획의 굵기를 조정했다.
그림 3-1은 그림 2에서 착시를 유도할 수 있는 표현을 추가했다.
그림 3-2는 안쪽 획의 굵기를 바깥 획보다 좀 더 가늘게 보정한 것이다.
그림 4는 그림 3의 두 요소를 결합한 것으로, 안쪽 획을 더 가늘게 만드는 동시에 착시를 유도하는 표현도 추가했다.
글자 디자인 2주 차는 선에 대해서 배운다.
2024년 2학기부터는 회오리 그리기 실습을 새롭게 추가했다. 가장 힘든 실습이 무엇일지 신나게 고민한 결과로 회오리를 선택했다. 회오리는 특정 방향으로 곡선이 점점 커지기 때문에 양쪽 조절점의 위치가 다르다. 그래서 펜 툴로 한 번에 그려낼 수 없다. 고정점 위치를 대략 설정해서 회오리 모양을 얼추 그린 다음, 고정점의 간격과 위치를 새롭게 정렬해야 한다. 그리고 곡선을 다듬어 마무리한다. 회오리의 모양이 잘 잡혔다면, 마지막으로 각 조절점의 위치가 적절한지 검산할 수 있다. 곡선에 대한 분석, 설계와 도구 활용, 그리는 솜씨가 차례대로 요구된다.
이미지는 학생 작업을 보정한 것. 여기서 좀 더 완벽해지려면 고정점 위치에도 축을 추가하는 것이 좋다.
1. 회오리 그리기
2. 고정점 표시
3. 조절점(핸들) 위치 점검
4. 고정점과 조절점 표시
5. 검산
이 인터뷰는 Magazine Q.t #5호에 실린 것을 옮긴 것입니다.
Magazine Q.t 보러가기
이건하: ‘이칠팔공’의 소개를 부탁한다.
강인구: ‘이칠팔공’은 하나의 글꼴을 완성하는 것을 목표로 디렉팅부터 시작해 글꼴 제작, 판매까지 이어질 수 있도록 기획한 프로젝트다. 김태룡 디자이너와 함께 각자 수강생을 두고 진행하고 있다.
이건하: 수업은 어떤 방식으로 진행되고 있나?
강인구: 수업 방식에 대해 고민을 많이 했다. 글꼴 제작에 대한 부분에서 디렉터가 얼마나 관여할지, 제작 기간은 얼마나 걸릴지 등 고려할 만한 부분이 많이 있었다. 그리고 글꼴을 실제로 판매하기까지 수요가 얼마나 있을지 모르니, 수업료를 선불로 받고 시작하기엔 부담스러울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일종의 계약 방식으로 진행이 됐다. 글꼴을 완성한 후, 판매한 수익의 일정 비율을 받는 형태로 계약을 정리했다. 그리고 수익에 대한 지급 한도를 설정했다. 지급 한도는 개인마다 조금 차이가 있는 편이다. 개인의 이해도, 글꼴의 난이도, 형태에 따라 계약 방식이 조금씩 다를 수밖에 없기 때문에.
김태룡: 예를 들면 본문용이라던가.
강인구: 그렇다. 본문용 같은 경우 짧으면 2년, 길면 3년까지 지속해서 수업을 이끌어야 한다. 그래서 그에 대한 수요와 난이도도 다른 기준으로 봐야 한다. 비교적 빠르고 가볍게 접근할 수 있는 조합식 글꼴과는 다르다.
김태룡: 계약서를 어떻게 써야 할지 고민을 많이 했다. 예를 들어 글꼴의 저작권은 누구 앞으로 설정할 것인지, 판매 수익은 어떻게 분배할 것인지, 지급 한도는 어떤 범주로 결정하면 괜찮을지 등 균형을 맞추는 것이 쉽지 않았다. 이 중 글꼴 저작권은 창작자가 온전히 가져가는 것에 나와 강인구 디자이너 모두 동의했다. 글꼴은 몇 년 가까이 긴 호흡으로 작업하고, 결국 직접 글자를 그린 사람은 작업자이므로, 글꼴에 대한 권리는 직접 그린 사람이 가져가야 한다고 생각했고, 독점 유통 기한도 설정하지 않기로 합의했다.
이건하: 두 분이 글자 디자이너로 지내온 경험으로 미루어 봤을 때 가장 적합한 형태의 계약 방식을 찾은 것인가?
김태룡: 그런 과정이다. 지금도 조금씩 계약 방식을 조절하고 있다. 후불 개념으로 판매 후 수익을 나누는 계약의 형태를 만들고 수업을 운영했다. 수익을 나누긴 하지만 일정한 한도 금액을 정한다.
이건하: 그렇다면 글꼴 모임이라기보다 클래스에 가까운 형태라고 봐야 하나?
강인구: 여전히 얘기하고 있는 지점은 있다. 우리가 이걸 지속할 수 있을지에 대한 논의도 계속하고 있다. 서로 좋은 작업 환경을 구축하자는 생각으로 만든 시스템이지만, 강제력이 없다 보니 기존 계획한 일정보다 늘어나는 경우도 있고, 완성을 어려워하는 경우도 생긴다. 글꼴과 관련된 기초적인 내용부터 작업 도구, 기획, 크라우드 펀딩, 제작, 유통까지 전반적인 모든 상황을 점검하다 보니 예상치 못한 수고가 발생한다.
이건하: 수업에서는 두 분이 함께 디렉팅을 맡고 있는지?
김태룡: 아니다. 수업의 형태를 같이 고민했지만, 실제 진행은 각자 진행하고 있다. 피드백이 섞이거나 양쪽에서 서로 다른 방향으로 얘기하는 것은 좋은 방법이 아니다. 어느 정도 완성이 되면 중간에 한 번씩 다 같이 모이는 자리를 만든다.
강인구: 어느 정도 기획과 형태가 나오고, 글꼴을 살펴볼 수 있는 최소한의 문장이나 단어들이 만들어져 있을 때 공유하기도 한다. 일정이 맞을 경우엔 크라우드 펀딩 전에 다 같이 모여 피드백을 주고받는다. 각자 진행하는 수업의 역할을 존중하는 편이고, 피드백은 열어놓고 진행하는 편이다.
이건하: 수업을 진행할 때 특히 중점을 둔 부분이 있는지 궁금하다.
강인구: 글자를 그릴 때, 그리는 방식에 대해 정확한 질서를 구축하고 진행해야 한다. 그래서 작업을 할 때 질서에 대한 강조를 많이 했고, 그 질서를 설정하는 방법에 대해서도 오래 이야기를 나눴다. 지금도 힘들어하는데, 워낙 콘셉트가 강한 글자라 기획 의도와 콘셉트가 한 몸처럼 보여야 하므로 이 부분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다.
김태룡: 앞서 말한 부분도 물론 중요하고, 또 덧붙이자면 이 작업의 결과물로 펀딩을 받거나 판매를 해야 하기 때문에 어느 정도 차별화가 되는 세일즈 포인트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이건하: 판매 쪽에 중점을 두고 있는 것인지?
김태룡: 그렇다. 더 새로운 형태라든가, 새로운 사용성에 초점을 맞추는 편이다. 실제로 판매가 돼야 상용화도 가능한 것이고 사람들이 사용하면서 꾸준히 노출되는 거니까. 글꼴을 계속 만들고 싶다면 판매에 대해서도 구체적으로 생각을 해봐야 한다. 1종 기준 300카피 이상 판매하는 것을 목표로 두라고 말한다.
민향기, ‘트로피컬’
이건하: 이번에는 글꼴을 완성하신 민향기, 이채림 두 분의 글꼴 이야기도 들어보고 싶다.
민향기: ‘트로피컬’은 아직 완성된 글꼴은 아니다. 사실 본문용 글꼴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도 있었지만, 첫 제작은 비교적 인상이 강하고 독특한 형태로 만드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제목용 글꼴을 만들게 됐다. 처음 스케치할 때 대비감을 통해 신나 보이는 획을 그려보면서 안정된 형태를 찾아나갔다. 조금씩 붙이고 빼면서 정리를 하다 보니 글자가 점점 활력 있게 느껴져서 ‘트로피컬’이란 이름을 붙이게 됐다. 이름을 붙이고 나니까 그다음부터 수월해진 것 같다.
이건하: 혹시 이름을 붙이는 것만으로 글자를 그리는 작업에 영향을 미쳤는지?
민향기: 그렇다. 아무것도 정해지지 않았을 때는 형태의 기준을 찾기 힘들었는데, ‘트로피컬’이라는 이름이 생겨난 후 콘셉트와 형태를 만들어 나가는 과정이 전보다 덜 까다로워졌다. 이때부터는 한글 글꼴의 필수적인 규칙과 콘셉트를 지켜나가며 글자를 그려나가기 시작했다.
강인구: 두 분 다 레터링 경험이 꽤 있으신데, 레터링에서 느껴지는 흥미로운 표현을 컨셉추얼한 글자로 그려보자는 가벼운 시작이었다. ‘트로피컬’ 같은 경우 획 변화가 중점이었는데, 진행하면서 획 사이 폭과 변화에 더 신경을 썼다. 그러다 보니 획 변화의 정도마다 어떤 재미가 있을지 혹은 어떤 인상을 보여줄 수 있는지 고민하면서 재미있고 활기찬, 밝고 명랑한 느낌으로 정해졌다. 그리고 어울리는 글꼴 이름을 짓는 도중 몇 가지 안이 나왔고, 여름에 느낄 수 있는 활기를 보여주려 했다. 어떤 획이 더 밝고 활기찬 형태인지, 너무 정적이거나 진지하지 않는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런 과정을 통해 글꼴은 차별성을 가진다고 생각한다.
이채림: ‘앙버터’는 귀엽고 획이 굵은 부리 글자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에서 시작했다. 처음부터 정확한 콘셉트를 잡고 시작한 건 아니었고, 막연하게 어떤 표현을 넣고 싶었다. 스케치를 하던 중 앙버터를 먹고 있어서 앙버터라는 글자를 그렸더니 인구 님이 ‘이거 앙버터 같은데요.’ 라고 하셨는데, 듣고 보니 마음에 들기도 했고 의도했던 콘셉트와 어울릴 것 같아 그렇게 쭉 진행을 해왔다. 그렇게 앙버터의 맛과 식감, 생김새를 특징으로 뽑아 글자에 표현했다.
이채림, ‘앙버터’
강인구: 덧붙이자면, 두 분의 진행 방식은 조금 달랐다. ‘트로피컬’같은 경우 외관상의 형태가 빠르게 정해졌다. ‘앙버터’는 기획이 빠르게 정리된 반면, 그 기획을 글자 형태로 구현하는 과정에서 난이도가 높았다. 일단 곡선이 굉장히 많은 글자이고, 곡선이 많다 보니 그 곡선을 다루는 방식을 이해하고 터득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렸다. 그리고 ‘앙버터’를 단순한 시각적 해석에서 벗어나 꾸덕한 식감의 정도, 맛과 질감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지 의논했다. 그 정도에 따라 곡선과 형태를 다루는 방식이 달라졌다.
이건하: 글꼴 제작 툴에서 핸들을 잡고 곡선을 다루는 방식에 대한 이해와 숙련도가 필수적인 것 같다.
강인구: 그렇다. 쉽게 말해서 노드는 형태를, 핸들은 곡선을 만드는 데 사용한다. 하나의 곡선 패스를 만들 때 위, 아래 노드를 2개 찍고 양옆으로 핸들을 4개 뽑을 것인지, 아니면 위, 아래, 왼쪽, 오른쪽, 4개의 노드를 찍고 핸들을 4개나 8개를 뽑을 것인지에 따라 표현할 수 있는 곡선이 달라진다.
이채림: 그 곡선의 정도가 진짜 어려웠다. 이해가 되는 것 같다가도 곡선을 조정하는 방식에 따라 텐션감도 달라지고, 그거를 다 통일되게 맞추는 것도 어려웠고.
이건하: 그게 왜 어려운 작업인지 설명해 줄 수 있나?
강인구: 핸들과 노드에 따라 곡선 패스가 얼마나 달라지는지 감을 잡기 어렵기 때문이다. 핸들과 노드 사이 거리가 곡선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알 수 있다면 형태를 예상할 수 있어서 수월하다. 핸들이 노드에서 멀어지는 비율만큼 형태가 날카로워지거나 둔해지기도 하고, 탄탄한 곡선으로 보이거나 물렁한 곡선으로 보이기도 한다. 이런 부분을 이해하는 데 시간이 걸렸다.
이건하: 이론적으로 명확하게 이해하고 툴을 다루는 훈련이 꾸준히 이어지는 게 중요한 것 같다. 마지막으로 원호 님의 작업 설명을 부탁한다.
박원호: 이 글꼴의 시작은 앞 두 분과 조금 달랐던 것 같다. 교내 동아리에서 스터디로 진행했던 레터링 작업이었는데, 객관적인 피드백이 없이 빠른 시간 내에 완성했었다. 당시 도시라는 주제를 가지고 일주일 정도 진행했던 작업이고, 단순히 도시를 떠올렸을 때 그 모습을 적합하게 표현하는 게 무엇일지 고민하다 아파트가 떠올랐다. 아파트가 가진 수직적이고 선이 굵은 형태에서 착안해 속공간이 많이 눌린 듯한 레터링을 만들었다. 그 후, 소장각에서 진행하는 워크숍에서 이 레터링을 글자로 확장시키고 싶다는 욕심이 들었다. 처음엔 여섯 글자(아파트공화국)만 진행했다가 추가로 한 문장 정도 만들어 봤는데, 글꼴로 확장하는 것도 가능할 것 같아서 지금까지 진행해 오고 있다. 이 글꼴에서는 핸들을 만지는 것보다 글자 사이 빈 공간을 조정하는 게 나에게는 더 어려운 작업이었다.
박원호, ‘아파트공화국(가제)’
이건하: 글꼴 이름은 아직 미정인가?
박원호: ‘아파트 공화국’이라는 레터링으로 시작되긴 했지만 이걸 그대로 가져갈지는 모르겠고 아직 모든 게 미정인 상태다.
이건하: 원호 님은 초기 단계이긴 하지만, 세 분의 글꼴 제작 소감도 들어보고 싶다.
민향기: 학과 내 타이포그래피학회에서 레터링만 하고 있었는데, 글꼴을 만들어 봐야겠다는 생각만 해오다 이번 기회에 완성까지 하게 되어 일단 뿌듯하다. 직접 그린 자음, 모음이 그 자리에서 타이핑을 하면 화면에 딱 나오는 게 너무 신기하기도 했다. 이전에는 글자를 그리면 시스템에 통용되는 언어 체계가 아니라 단순한 시각적 모양이나 도형으로만 구현되었는데, 이제는 도형과 시스템이 결합해 하나의 글꼴이라는 위치에서 작동하는 것이 흥미로웠다.
김태룡: 글꼴을 크라우드 펀딩 사이트에서 오픈하고 후원을 받았는데, 펀딩 성공 후 심정을 들어보고 싶다. 이후 반응에 대한 생각도 궁금하고. 실제로 사람들의 반응이 후원 금액과 같은 형태로 나타나니까 드는 생각이 있을 것 같다.
민향기: 사실 이렇게 판매 수치를 바로 보여주는 플랫폼에 올린 건 처음이라 뭔가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이채림: 펀딩 오픈하고 나서 첫날 열리자마자 반응이 되게 좋았다. 주식처럼 계속 새로고침을 하면서 10분에 한 번씩 들어가게 되는… 너무 신기해서 계속 들여다보게 되더라. 일단 뿌듯한 마음이 가장 크다. 작업 초기 글립스 파일을 열어보면 노드와 핸들도 너무 못 썼고 형태도 못생겼다고 느끼는데, 지금 하는 걸 보면 글자도 많아졌고 형태도 이전보다 잘 다듬어진 부분이 보인다. 그리고 레터링과 글꼴의 차이를 확실히 알게 되었고, 이번 기회를 통해 좋은 경험을 했다고 생각한다.
이건하: 진행 중인 원호 님의 생각도 들어보고 싶다.
박원호: 레터링은 한정된 글자 안에서만 조형성을 고려하면 되는데, 글꼴로 제작해 보니 고려해야 할 경우의 수가 엄청 방대해지고 예상치 못한 곳에서 문제점이 많이 나왔다. 임의로 정한 규칙성에 대해 시각 보정하는 과정이 제일 어려웠던 것 같다. 지금도 그런 공간에 대한 세밀한 조정이나 시각 보정을 해가고 있는데 아직 보는 눈이 없어서 그런지 쉽지 않다.
김태룡: 경험상 가르쳐 보면 미리 알려주는 거는 소용이 없더라. 본인이 겪어봐야 알게 되는 것 같다. 옛날 작업을 1년 뒤쯤에 보면 이상함을 느끼게 마련이다. 스스로 그걸 보고 느끼기 전까지는 옆에서 가르쳐 준다고 볼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조금 시간이 걸리더라도 어쩔 수 없는 부분은 있다. 그렇다고 계속 따라다니면서 간섭하다 보면 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하기 싫어질 수도 있고. 전체 글자를 모두 그려보면서 파악해야 보이는 부분도 있기 때문에, 처음부터 욕심을 낼 수는 없다.
이건하: 향기 님과 채림 님은 글꼴을 거의 완성하셨는데 만들면서 어려웠던 점이나 인상 깊었던 글자가 있었는지?
민향기: 사실 어려운 걸 뽑으라면 너무 많다. 앞서 계속 나왔던 것처럼 한글 만들 때 기준을 잡는 게 정말 어려웠다. 인상이나 콘셉트가 정해졌더라도 그에 맞는 첫닿자 크기라든가, 아니면 받침 크기나 위치, 이런 거를 결정하는 게 힘들었다. 아직도 계속 수정 중이고 아마 많이 바뀔 것 같다. 그리고 펀딩 사이트에 올릴 이미지 만드는 것도 어려웠다. PR을 해야 하고 설명을 잘 해줘야 하는 이미지인데, 콘셉트와 의도를 이미지에 담아 전달해야 하는 점이 쉽지 않았다. 내 의도와 다르게 전달될 수 있고 객관적으로 내 글꼴이 어떻게 보일지 판단하기가 어려워서 이미지 만드는 데 거의 글립스를 사용한 만큼 시간을 쓴 것 같다.
이건하: 구매하는 사람이 이해하기 쉽고 매력적이게 느낄 수 있도록 간략하게 정리해서 만들어야 하니까 쉬운 일은 아니다. 이 부분은 태룡, 인구 님도 공감하는 부분인가?
김태룡: 펀딩을 위한 이미지 만들 때 글자를 올리고 나면 그 글자의 결점이 갑자기 보이기 시작한다. 그러면 고치고 다시 이미지 만들고, 근데 또 보이고. 그러다 보면 일주일씩 더 걸리는…
민향기: 처음에는 되게 쉽다고 생각했다. 한 2주면 할 줄 알았는데 정말 오래 걸렸다.
강인구: 이게 오래 걸릴 걸 예상하니까 빨리 시작해야 한다고 말했었는데 두 분이 길게 잡아도 한 달이면 된다고 하셔서 어떻게 만들어 오는지 기다렸다.
이채림: 남들이 봤을 때 사고 싶은 마음이 들어야 할 것 같은데, 이걸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인구 님에게 피드백을 받으면서 진행했는데, 볼 때마다 수정 사항을 많이 보내주셨다. 수정사항을 보기 전까지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부분이었다. 글자를 만들 때도 인구 님에게 여쭤보기 전까지 이게 맞는 건지 틀린 건지 혼자 판단하는 게 힘들었다. 한 글자를 만들 때도 완성이 무엇인지, 도대체 어디서 멈춰야 하는지도 모르겠고 얼마나 수정을 해야 하는지 그런 게 좀 어려웠던 것 같다. 그리고 인상 깊었던 글자는 피읍. 글자를 그릴 때 한 네 번 정도 수정하고 형태를 아예 바꿨다. 강인구 덧붙여 말씀드리면 여러 번 바뀌었던 이유가 글자 형태를 쓰기로 가져갈 것인지 아니면 앙버터만의 질감으로 만들 것인지에 대한 부분 때문이다. 쓰기를 기준으로 형태로 잡으면 두께가 있어서 공간이 나오지 않는다. 형태가 다 표현될 수 있는 공간이 제한적이었고, 직선으로 획을 그리면 다른 글자처럼 질감이나 인상이 나타나지 않아서 어떻게 해결하면 좋을지 고민을 많이 했다. 피읖만 그런 건 아니고 꽤 여러 글자가 그런 과정을 겪었다. 전반적으로 컨셉추얼한 글자를 그린다는 건 이런 부분에서 굉장히 많은 노고가 들어가는 편이다.
강인구: 배우는 입장에서 글꼴에 존재하는 질서를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게 가장 힘들 것으로 본다. 자소가 하나 달라지는 것만으로 완전히 다른 질서가 생성되거나, 자소 형태에 따라서도 질서가 달라지니까. 이런 것들을 이해시키는 부분이 어렵고 힘든 지점 같다. 그리고 제작뿐만 아니라 판매가 될 수 있는 포인트를 잡아주고, 판매까지 이어질 수 있도록 설계하는 것에 부담과 책임을 느끼고 있다.
이건하: 글꼴 제작부터 판매나 유통까지 다양한 부분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 흥미롭다. 태룡 님의 생각은 어떠한가?
김태룡: 일단 도망 안 갔으면 좋겠다. 실제로 하다가 중도 포기하는 경우가 많이 있기 때문. 레터링 클래스나 서른 글자 정도만 만든다고 하면 거기까지는 너무 즐겁고 재미있는 시간인데, 이걸 완성까지 한다는 건 그 외적으로 깔려 있는 어려운 부분들도 전부 건드려 보는 거라 중간에 질려하는 경우도 꽤 있다. 특히 평소 안 쓰던 문장 부호나 글자 같은 경우는 낯설고 어렵기 때문에 그런 부분들도 잘 마무리를 해줬으면 한다. 또 마찬가지로 세일즈가 매우 중요하긴 한데, 그래도 뭐 망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조금은 열어두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이건하: 모든 글자가 완성이 된다고 해서 글꼴로 잘 팔리고 잘 쓰이는 건 아니니까?
김태룡: 아직 그런 사례는 없지만, 1년에 한 종도 안 팔리는 글꼴이 생기면 어쩌나. 그런 고민도 했었다.
이건하: 글꼴을 만드는 것 자체가 굉장히 어렵고 고된 일이긴 하나 완성된다고 반드시 판매된다는 보장이 없다는 게 참 힘든 작업이라고 느껴진다. 이제 수강생 세 분께 질문 드릴텐데, 이후 제작해 보고 싶은 글꼴이 있다면 알려 달라. 단순히 구상 중인 글꼴도 괜찮다. 그리고 글꼴 제작을 배우고 있는 이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민향기: 일단 제목용으로 판매까지 해봤으니까 본문용 민부리 글꼴을 만들고 싶다. 본문용 글꼴이 글자 공부에 도움이 많이 된다고 알고 있어서 생각해 보고 있다. 그리고 졸업 전시에 응용할 수 있는 실험적인 글자도 만들고 싶다. 비교적 글리프 수가 적은 라틴 타입으로. 글꼴 제작을 배우는 분들에게 도움이 되는 말을 해드리자면 극점을 활용해 모양을 깔끔하게 다듬고 불안정해 보이지 않게 만드는 훈련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 글자 외에도 다른 그래픽 요소를 만드는 데 충분히 응용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이채림: 마찬가지로 본문용 글꼴을 만들어보고 싶은데, ‘앙버터’와 달리 점잖은 인상의 제목용 글꼴도 한 번 더 만들어보고 싶다. 펀딩을 올릴 때쯤에는 너무 힘들어서 다른 글꼴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런데 계속하다 보니 정말 보람 있는 작업이고, 글리프가 하나하나 채워지면서 성취감도 느껴지는 작업이라 앞으로도 쭉 해보고 싶다. 그리고 향기 님이 말해주신 것처럼 글꼴 제작을 공부하고 있다면 곡선 다루는 법과 노드, 핸들 다루는 법을 열심히 훈련하면 좋지 않을까. 그게 곧 완성도를 좌우하는 것 같아서 알아두면 정말 도움이 많이 된다. 그리고 나에게 일어난 일은 아니지만 파일 관리를 잘 해두어야 한다.
이건하: 파일이 날아가거나 유실되는 상황을 말하는 건가?
강인구: 한 번 그런 일이 있었다.
이채림: 향기 님이 너무 힘들어해서 마음이 아팠다.
민향기: ㅠㅠ
이건하: 안 그래도 호흡이 긴 작업인데 그런 사고가 생기면 더 딜레이되니까. 마지막으로 원호 님도 말씀 부탁드린다.
박원호: 당장 구상 중인 글꼴은 없는데 두 분과 비슷한 것 같다. 사실 글꼴을 만든다는 건 디자이너가 하나쯤 가지고 있는 야망이 아닐까? 본문용 글꼴을 나만의 것을 만들겠다는 욕심은 있는데, 아직은 막연히 해보고 싶다는 마음만 가지고 있다. 앞으로의 계획은 두 분과 다르게 아직 걸음마 단계라 많이 배워야 하고 안목을 기르는 중이다. 그리고 글자를 다룬다는 게 어떻게 보면 모든 디자이너가 필수적으로 가져야 하는 소양인 것 같아서, 단기간 내에 글자를 보는 안목을 기르려면 글자를 직접 디자인해 보는 게 좋은 것 같다. 주변에 글자를 만들고 싶은 친구들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시도라도 해봤으면 좋겠다. 학교에서 하기 어렵다면 당장 학교 밖으로 나오기만 해도 글자에 관심 있는 분들이 굉장히 많다. 단 몇 문단 정도라도 글자를 만들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다들 시도는 해봤으면 좋겠다.
이건하: 세 분의 글꼴 제작으로 시작한 ‘이칠팔공’의 수업 방향과 목표가 있다면 말해 달라.
김태룡: 다들 이제 하나 끝내 봤으니까 두 번째 프로젝트를 했으면 좋겠다. 우리가 진행하는 수업에서는 처음부터 높은 단계를 요구하지 않는다. 제목용이라든가 만들기 쉬운 조형을 유도하는 편인데, 자칫 거기서 매몰돼서 그걸 반복하지는 않았으면 한다. 앞으로 조금씩 더 어려운 것들을 하나씩 경험해 보면 좋겠다.
강인구: 몇 주짜리 강의로 글꼴 한 벌을 완성한다는 건 매우 어려운 일이다. 이 강의를 하는 이유는 강의를 듣고 글꼴을 완성해 보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한 벌의 글꼴을 완성하는 데 도움을 주고 싶다는 생각이 기반이었던 것 같다. 태룡 님이 말해주신 것처럼 이 프로젝트가 끝나더라도 더 좋은 글꼴을 만들기 위해서 스스로 노력해 봤으면 좋겠다.
이건하: 이제 마지막 질문이다. 각자 기획 중인 프로젝트나 글꼴, 혹은 진행 중인 작업이 있나?
김태룡: 2023년 초에 공개했던 ‘산작’이라는 글꼴을 고정 폭으로 다시 리뉴얼해서 진행하고 있다. 논문으로 낸 내용도 있어서 학술지 발행이 늦춰지지 않는다면 올해 6~7월 정도에 공개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김태룡, ‘한글 조판에서 「홑낫표」와 『겹낫표』의 너비 설정에 대한 고찰’
이건하: 졸업 논문으로 이어지는 것인가?
김태룡: 일단은 소논문이다. 분각 개념에 관심이 있어서 이 개념을 응용해 글꼴에 모듈 형식으로 적용하기 위해 제작과 설문조사, 그리고 실제 사용까지 이어질 수 있도록 연구 중에 있다.
이건하: 인구 님은 어떤 작업을 하고 계시는지?
강인구: ‘긱산스’라는 작업을 해오고 있는데, 2년 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해 작업하고 있다. 민부리 글자에 여러 가지 기능들이 들어간 글꼴이다. 오픈타입 피처라는 기능이 있는데, 몇 가지 클릭만 하면 자동으로 자소가 바뀐다든지, 글리프가 대체된다든지 하는 기능들이다. 이를 한글에 적합한 오픈타입 피처 기능으로 정리하고, 최대한 많은 기능을 지원하는 글꼴 가족을 만들어보는 것이 목표라 ‘긱산스’에 오픈타입 피처 기능을 최대한 많이 정리를 해서 넣고 있다. 글꼴을 출시하면 항상 가이드북을 만드는데, 가이드북에 오픈타입 피처 기능이나 정보가 실릴 예정이다. 또 그 안에 다국어도 어느 정도 쓸 수 있게끔 유럽 언어와 일본어, 이런 것을 포함해 글꼴을 만들고 있다.
이건하: 그렇다면 아시아 문자를 다루는 것에 초점을 맞춘 형태일까?
강인구: 그렇다. CJK의 많은 부분을 쓸 수 있게끔 하고 싶은데, 문제는 한자 쪽이다. 그리고 아시아 문자뿐만 아니라 라틴 알파벳이나 숫자에서 모노 스페이스라고 하는 고정폭 글자를 오픈타입 피처 기능을 활용해 쉽게 대체할 수 있도록 해보려 한다. 목표는 올해 안으로 끝내는 건데 얼마나 걸릴지 모르겠다. 지금도 계속 추가되고 있는 기능들이 있어서 확실하게 가늠이 안 되는 상태다.
이건하: 두 분 다 글꼴에 대해 말씀해 주셨는데 제작한 글꼴이 사이트에서 판매가 되는 형태인가? 판매 경로나 그런 것들을 예상하는 곳이 있는지?
강인구: 일단 완성하면 지금 태룡 님이 운영하고 있는 ‘11172.kr’에 올라간다. 크라우드 펀딩 여부는 고민 중이다.
강인구, ‘긱산스’
산작은 가변폭으로 설계했다. 고정폭으로 수정하려면 획이나 동세의 흐름을 포기하고 아무래도 글자틀에 맞게 넓히고 균등하게 재배열하는 과정을 거쳐야 하는데, 이를 바로 시도하기엔 부담스러웠다. 산작을 수정하고 있던 당시에도 디자이너들 입장에선 고정폭 글꼴로 본문을 조판하는 것이 익숙하고 편안할 것으로 예상은 했다. 그래서 시험삼아 산작을 고정폭으로 몇 글자 만들기 시작했다. 균형은 산작에 기반하지만, 가로로 조판하기에 좀 더 적합하게 수정했다. ‘를’과 같은 세로모임꼴 글자는 보를 좁히고, 글자높이는 일정하게 압축했다. ‘김’과 같은 가로모임꼴 글자는 고정폭 너비에 맞춰서 글자너비를 확장했다. 부리, 인상을 좀 더 날렵하게 변경하면서 획 설계도 3-10유닛 가늘게 바꿨다. 가능하면 24년에는 출시하려고 한다.
11172.kr은 2022년부터 운영하기 시작했다. 세부적인 기능 구현은 옥이랑 디자이너의 도움을 받았다. 내가 만든 글꼴을 판매하려고 만들기 시작했지만, 주변의 글꼴 디자이너들도 함께 판매할 수 있도록 자리를 만들었다. 가급적 품이 들지 않도록 시스템을 구축했고, 문의를 할 만한 부분도 미리 정리했다. 유지비용을 최대한 줄였기 때문에 입점 수수료도 10%로 책정했다. 이 정도가 적정한 기준이라고 본다. 이번 여름에는 글자디자인에 관심 있는 분들을 위해서 글립스 사용법과 레터링 관련 모임도 진행해 볼까 한다. 언젠가는 한 벌의 글꼴을 완성해 오길 기대하면서. 쉽지 않은 환경이지만 한글 글꼴 유통이 건강하고 활발하게 이루어지길 희망한다.
어도비 일러스트레이터의 모퉁이 위젯. 손쉽게 모서리를 곡선으로 만들 수 있다.
어도비 일러스트레이터의 모퉁이 위젯은 업데이트된 이후 도형을 작도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는 기능 중 하나다. 손쉽고 빠르게 모서리를 굴리거나 둥글게 만들 수 있어서 다양하게 활용된다. 최근에는 이 모서리에서 기계적인, 천편일률적인 곡률이 싫을 때가 있어서 살짝 변형한 곡선을 사용하곤 한다. 모서리 하나하나씩 수정하는 순간 작업시간은 당연히 몇 시간이 늘어난다. 툴이 발달해도 여전히 개인의 기호와 취향을 반영할 곳을 찾기 마련이다.
브러쉬 도구로 간단하게 스케치
펜 (P) 도구를 활용해서 선으로 작도
작도한 선을 시각보정으로 조금 더 다듬기
면으로 변환 후 맺음과 두께 보정. 니은(ㄴ)을 미세하게 두껍게 보강했다. 고정점 도구(Shift + C), 고정점 추가 도구(+) 등을 잘 활용하면 원하는 선을 자유자재로 만들 수 있다.
산작을 제작하면서, ‘ㅜ’와 ‘ㅇ’이 만날 때나 ‘ㅎ’의 경우 상투는 없애거나 정리하지 않고 서로 일정하게 겹치는 정도로 처리했다. 낱글자에 따라 있는 경우도 있고, 없는 경우도 있다. 낱자가 결합하는 한글의 특성상 “겹침“이라는 단어는 꽤 오랫동안 머릿속에 머물러있던 개념이기도 하다. 상투는 ‘ㅇ’의 조임을 강조하는 역할을 하기도하고, 속공간과 낱자 면적을 조율하는 장치로도 기능한다. 상투 없이 밋밋한 ‘ㅇ’을 가진 글자 균형을 조율하다 보면 결국 어느 지점에서 속공간이 눈에 걸리는 곳들이 생겨나곤 한다.
무엇인가 매끈하게 다듬는 것이 디자이너의 본능이라 그런 것일까?, 디지털 환경에서 복사, 붙여넣기가 손쉬워서 그런 것일까? 혹은 둘 다인지 모르겠지만 한글의 이런 '턱'들은 너무 고민 없이 밀려버리거나 조합별로 통일되어 버리곤 했다.
그나저나, 산작은 너무 턱이 많나?😎
숙련된 글자 디자이너들은 대부분 선 다루는 게 굉장히 익숙해서 조형만 봐도 어떻게 점을 구성했는지 역산이 가능할 텐데, 최근 몇 년간 수업을 진행하는 학생들을 대상으로 테스트를 해보곤 했다.
선으로 이루어진 글자를 A4용지에 출력해서 앵커포인트와 핸들포인트를 필기구로 표시하도록 했다. 벡터그래픽의 기반이 되는 베지에 곡선을 잘 체화하고 있는지 테스트해본 것인데, 의외로 꽤 많은 학생들이 핸들포인트를 반대로(...) 구사하는 경우가 있어서 꽤 놀랐다. 생각해보면 펜 툴을 다룰 일은 점점 줄어들고 있고, 누군가 만든 소스를 활용하고 배열하는 것만으로 결과물을 만드는 일이 많아졌다. 도구와 AI가 발전할수록 이런 일이 많아질 텐데, 기본기를 어떻게 다듬을지 고민이 드는 지점이기도 하다.
스스로 표시한 후에는 고정점과 조절점이 표시된 종이를 받아 자신이 작성한 종이를 비춰볼 수 있도록 했다. 조절점의 강약이 틀린 건 괜찮지만, 방향이 틀린 것은 베지에 곡선이 구현되는 원리에 대해서 다시 한번 되돌아보면 좋다.
고정점만 표시한 이미지
고정점과 조절점을 함께 표시한 이미지. 펜 툴을 다루는 것에 익숙한 디자이너라면 조절점의 위치에 따라 곡선이 어떻게 변화하는지 예측할 수 있을 것이다.
붓글씨를 시작하면서 처음 배우는 원칙 중 하나가 한 획에 한 번 이상 손대지 말라는 것이다. 나이가 어린 학생들은 종종 멋진 글씨를 쓰고 싶은 마음에 획을 몇 번씩 덧칠하기도 한다. 그러나 한 획을 두 번 긋는 순간 좌우에 미묘한 어긋남이 생기고 만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디지털로 글자를 설계할 때도 대부분 한 획은 한 번에 그인 것처럼 솜씨 좋게 선을 다듬을 필요가 강제된다. 특히 ㅊ의 삐침을 이루는 왼쪽과 오른쪽 각각의 곡선과 같은 지점에서 그러한 특징이 잘 드러난다.
그런데, 한글 글꼴이 어려운 것은 세부적으로 파고들수록 이러한 원칙들이 상충하는 지점이 나타난다. 획의 일관성도 중요하지만, 속공간의 관점에서 낱글자를 바라보면 또 다른 지점이 있다. 산작을 설계하면서 속공간을 이루는 내곽의 선은 직선으로 설계했지만, ㄹ의 바깥선은 곡선으로 설계했다. 시선이 들어오는 외곽의 선은 곡선이 더 적합하다고 판단했고, 속공간을 이루는 내곽의 선은 직선을 적용하는 것이 적합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는 곡선에 비해 직선으로 속공간을 설계했을 때 글자가 더 시원하고 깔끔하게 보이는 효과를 노린 것이기도 하다.
또, 속공간은 글자를 세우는 골격 역할을 병행하므로 글자가 좀 더 단단하게 보이길 바란 것이기도 하다.
개인적으로 글꼴을 볼 때 4가지 기준을 가지고 따져본다.
1. 모작: 충분히 잘 베꼈는가?
2. 열화: 충분히 잘 못 베꼈는가?
3. 역설계: 사람이 편안하게 느끼는 요소들을 잘 이해하고 있는가?
4: 재조합: 읽어낸 요소들을 유기적인 맥락으로 잘 연결했는가?
새롭다는 것은, 기존에 없던 것을 발견하거나, 기존에 존재하는 것을 새롭게 조합하는 것이다. 글꼴 설계에서 새로운 것을 발견하는 것은 어렵다. 이미 수백, 수천 년간 사람들이 쌓아둔 데이터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기존에 존재하는 것들을 잘 분석하고, 이해하고, 새롭게 조합하는 것이 글꼴 디자이너가 창의성을 발휘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타이포그래피를 다루는 사람들 중에는 때때로 서예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경우가 있다. 기본적으로는 동의하지만, 목적과 수단을 혼동할 필요는 없다. 중요한 것은 서예 그 자체가 아니라 붓이 움직이는 원리, 사람의 몸이 움직이는 동선을 이해하고 다룰 수 있는 것이다. 서예가와 글꼴 디자이너 서로 이해하고 활용하는 영역이 다르다.
글꼴은 어떤 시각에서는, 글씨의 모조품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기술과 인식의 확장에 따라 가짜로 여겨지던 것이 원본을 대체하는 현상은 언제나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현재의 글꼴 디자인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을 글씨의 역설계 과정이라고 본다. 글꼴은 이미 오래전에 글씨의 영역을 일정 부분 대체할 만큼 편리했지만, 아직 글씨의 깊고 세밀한 부분들을 충분히 이해하고 분석한 상황은 아니라고 보기 때문이다.
글자체의 개성과 특징은 부리에 잘 드러난다. 그러나 글자체의 품질에 대한 판단이 필요한 경우, (물론 다양한 기준으로 판단해야겠지만) 우선 꺾임을 어떻게 설계했는지 살펴본다.
꺾임은 한번 뻗은 획의 기세가 정리되는 동시에 다음 지점으로 넘어가기 위한 디딤돌의 역할을 한다. 따라서 획의 길이, 각도에 따라 꺾임의 모양도 달라진다. 기역의 경우를 살펴보면 기운줄기가 45도 각도로 꺾이는 것부터 90도로 꺾이는 것까지 다양하다. 그에 따라 꺾임의 모양도 변화한다. 디자이너가 필기구와 신체의 구조, 움직임을 잘 이해하고 있어야 꺾임을 자연스럽게 설계할 수 있다.
그런데 글꼴 제작에 컴퓨터가 도입되면서 복사/붙여넣기가 쉬워졌다. 물론 압도적으로 장점이 많지만, 서로 달라야 할 낱자가 지나치게 비슷하게 그려지는 경향이 눈에 띈다. 심각하게는 획의 움직임과 관계없이 꺾임이 일괄적으로 똑같이 생긴 경우도 발견된다. 아무리 통일성이 강조되더라도 기역은 기역처럼 생겨야 하고, 니은은 니은처럼, 미음은 미음처럼 보여야 한다.
붓은 부드러운 털을 먹에 적셔서 쓴다. 그래서 만년필이나 연필, 볼펜 등 끝이 단단한 필기구에 비해 자유분방하고 강약조절에 장점이 있다. 물론 사용이 어렵고 오래 걸린다는 단점도 있다.
붓이 종이에 처음 닿는 부분을 기필, 혹은 입필이라고 한다. 부리를 말하는 것인데, 붓이라는 도구의 특징이 확고하게 드러나는 부분인 동시에 다양한 가능성이 정리되고, 앞으로 뻗어갈 획에 대한 준비를 마치는 곳이다. 종이에 붓을 대는 순간, 붓끝의 무수한 모와 먹을 가다듬는 것이다. 부리는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도구의 특징과 가능성이 단적으로 드러나는 부분으로, 작은 부분이지만 힘의 흐름이 다채롭게 녹아있기 때문에 곡선과 표현을 더 예민하게 다듬어야 한다. 특히 ‘빼’나 ‘ㅖ’처럼 부리가 많고 그 각도나 힘이 제각각 달라지는 경우 그 난이도는 수직 상승한다.
고딕의 시각보정은 두께와 길이, 높이를 중심으로 설계된다. 반면, 명조의 시각보정은 부리와 맺음의 크기를 중심으로 설계된다.
명조의 보(ㅡ)를 살펴보자. 보의 부리와 맺음은 왜 유독 크게 설계되어 있을까? 몇 가지 이유를 찾아보자. 첫 번째 설명은 낱글자의 외곽을 튼튼하게 만들기 위함이다. 그러나 이는 첫 닿자(자음글자)의 부리, 맺음과 비교해 크게 설계된 이유가 아니라 부리와 맺음의 역할 그 자체라는 점에서 제대로 된 설명이 아니다. 두 번째. 보(ㅡ)는 낱글자에서 가장 긴 획인 동시에 가장 힘찬 기세를 담은 획이므로 이를 반영한 것이다. 꽤 많은 부분이 설명되긴 하지만, 본질적으로 왜 사람이 글자를 쓸 때 보를 길게 쓰고, 그를 자연스럽게 여기는지 설명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한계를 보인다. 그렇다면 세 번째. 지금까지 찾은 가장 설득력 있는 설명은 이렇다. 조합되는 낱자(ㅌ/ㅡ/ㄷ)의 존재감을 비등하게 유지하기 위한 장치다. 보는 단 하나의 선으로 닿자(ㄱ-ㅎ)과 동등한 수준의 존재감을 가지려고 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하나 더. 홀자'ㅣ'와 'ㅡ'를 비교해보자. 대체로 세로기둥보다는 가로로 쓴 'ㅡ'꼴에서 부리와 맺음이 더 크다.
어도비 일러스트레이터 펜 툴로 작업할 때, 직선 다음에 이어지는 곡선의 핸들을 하나만 쓰는 경우를 꽤 자주 본다. 이렇게 작도하는 경우, 보이지 않는 핸들 포인트는 고정점의 영점에 숨어있다. 펜 툴로 선을 이어 그리면 자연스럽게 그렇게 유도되기 때문에 그런 듯하다. 좀 더 아름답고 균형잡힌 곡선을 구현하고 싶다면 핸들 포인트를 두 개 다 꺼내쓰라고 권유하는 편이다.
디자인이 완성되는 시점은 어디일까? 많은 책 디자이너는 책이 인쇄되어 물성을 획득하는 시점을 책 디자인의 완성으로 여기는 듯하다. 나 역시 종이에 인쇄된 글자를 볼 때, 데이터로만 존재하던 글꼴이 현실에 발을 내딛는 듯한 감정을 종종 느낀다.
그러나 글꼴 디자인은 그 결과물이 데이터인 글꼴(폰트)로 완성되는 일이고, 그렇기 때문에 완성의 시점은 어디인지 고민스럽다. 그런 과정을 몇 년간 거치다 보면 물성에 대한 집착이 어느 순간 데이터의 완결성에 대한 집착으로 바뀐다. 글자를 구성하는 점의 개수. 점의 위치. 곡선에 이르는 요소 하나하나가 논리적이라고 여겨질 때, 더는 설명하기 어려울 만큼 쪼개어놓았을 때, 데이터가 데이터 그 자체로 아름다운 순간에 집착하게 된다.
한편, 많은 툴에서 표준처럼 사용하는 글꼴의 기본 크기인 12포인트는 6분의 1인치, 1파이카를 포인트로 변환한 것이다. 72포인트는 1인치(=6파이카)를 변환한 것이다.
표 문자, 괘선 문자, 혹은 상자 그리기 문자(Box Drawings Characters)는 이름 그대로 상자나 표를 그릴 때 사용하는 문자다. 선이 조각된 글자를 하나씩 꿰맞춰 표를 그릴 수 있고, 대체로 도스(DOS) 운영체제나 초기의 게임 그래픽, 간혹 아스키 아트에서 볼 수 있다.
즉, 요즘처럼 그래픽 툴이나 표 그리기가 쉬운 환경에서는 정상적으로는 사용할 일이 거의 없는 문자고 처음 목적을 잃어버리고 표를 그릴 수 없게 만들어 놓은 글꼴도 있다. 게다가 자간, 행간이 딱 붙게 조절해야 하고 고정폭으로 설정해야 하니 이걸 써서 깔끔한 표 한 장 그리는 건 아주 골치아프다. 이놈을 이제 그만 문자 세트에서 빼야 하나 고민도 해보지만, 대부분의 글꼴 규격에 포함되어 있어서 안 그려 넣기엔 찜찜하다. 막상 그리기는 어렵지 않아서 사실 별 불만 없이 쉬어가는 시간 정도로 생각하며 그려 넣곤 한다. 대체로 표 문자는 선을 여백 없이 끝까지 채워 넣는 것이 일반적이다.
각각의 표 문자를 배열 중인 모습
각각의 표 문자를 조합하면 여러가지 표를 그릴 수 있다. 물론 현 시점에서는 더 편리한 방법이 많다. 엑셀이나 표 그리기에 특화된 프로그램이 아니더라도 대부분의 편집 프로그램에서 표 그리기 기능을 제공하고 있다.
어도비 일러스트레이터 툴은 대부분의 학교에서 기본적으로 제공하는 편이다. 그래서 학생들과 레터링을 작업할 때, 가르칠 때 사용하는 빈도가 점차 늘고 있다. 그런데 학생들에게 설명하려고 보니 앵커(anchor), 핸들(handle) 등 용어에서부터 소통이 막히는 일도 빈번하다. 어떤 경우는 외래어를 쓰고, 어떤 경우는 한글로 쓰는 부분도 조금 아쉬운 부분이지만 근본적으로는 세부적인 명칭까지 외우면서 작업하는 사례 자체가 드물기도 하다.
어쨌든, 용어는 조금씩 수정해나갔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는데 개인적으로는 일러스트레이터에 이미 적용되어있는 「고정점」은 아주 익숙하게 쓰고 있고, 「핸들」은 「조절점」 정도로 수정하면 좋겠다. 「패스」는 「선이나 곡선」 혹은 「경로」 정도로 바꾸면 괜찮을 것 같다. 대체로 학생들에게 “패스를 좀 더 만져주세요, 곡선을 예쁘게 다듬어주세요” 정도로 적당히 뭉뚱그려서 말하곤 하지만, 때때로 좀 더 세밀하게 말해야 하는 상황은 있기 마련이고, 그럴 때는 핸들(조절점)의 비율을 맞춰달라거나, 특정 비율로 수정해보도록 권유한다.
한글 부리 글자의 획 모양을 살펴보면 대체로 획의 외곽에 해당하는 부분은 부리나 맺음, 꺾임 등 ‘무게추’ 역할을 할 만한 장치를 달아 시선이 쉽게 들거나 빠지는 것을 막는다. 이를 8가지 방향으로 나누어 보면, 이 중 시선이 드나들도록 설계된 곳은 2번, 4번, 5번이다. 이곳에는 무게추의 역할을 수행하는 장치가 없다. 물론 세로쓰기의 영향을 고려하면 아래로 시선이 흐르는 것은 자연스럽다고 볼 수도 있으나, 같은 세로쓰기 문자인 한자를 살펴보면 대체로 5번 방향에 무게추를 놓아 시선을 막는 경향을 보인다.
왜 이런 차이가 나타나는가? 여러 요인이 작용하겠지만, 그중 한 가지 가설은 한 글자로서 의미가 완결되는 한자(표의문자)는 그 끝을 맺어주고, 낱글자 하나로 의미가 완성되지 않는 한글(표음문자)은 연결성을 중시한 것이 아닌가 추측한다.